모든 것을 전부 다시 사유해야 한다
from. 배세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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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을 통해 필자는 독자들이 두 권의 책을, 더 나아가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1)를, 더 나아가 일본의 종교사학자이자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의 사상을 읽도록 강하게 ‘유혹’하고 싶다. 필자는 이 서평에서 그의 작업을 읽으며 느꼈던, 각종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그의 작업을 읽도록 ‘유혹’하게 만들었던 희열에 대해 논해보고 싶다.
1) ‘카이에 소바주’(Cahier Sauvage) 시리즈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개념이자 저서명인 ‘야생의 사유’(pensée sauvage)를 본따 나카자와 신이치가 자신의 강의록 시리즈에 붙인 이름이다. 『대칭성 인류학』은 그 마지막 권, 즉 결론이다.
무너지는 세계, 문명의 붕괴
필자가 감수를 진행하고 해제를 집필했던 브뤼노 라투르 최후의 대담 『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에서 라투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 기이하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일이 다 벌어지고 다 망하고 다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로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2) 언론인 손석희 식으로 말하자면 ‘세 개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3) 필자 자신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정치, 경제, 생태, 그러니까 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연의 위기가 결합하는 삼중의 위기로 인해 인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로, 자연과학적인 ‘6차 대멸종’으로 흔들림 없이 나아가고 있다. 라투르의 말대로 ‘일이 다 벌어지고 다 망하고 다 끝’난 것이다.
2) 브뤼노 라투르, 니콜라 트뤼옹 지음, 『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 이세진 옮김, 배세진 감수와 해제, 복복서가, 2025, 160-161쪽.
3) <JTBC 신년 대기획 세 개의 전쟁> 1~3부, JTBC, 2023년 1월 25일-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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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놀랍게도 다른 한편, ‘정말로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우리는 강하게 받는다. 왜일까?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가장 보수적인 사고들에서부터 가장 급진적인 이론이라는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라투르가 비판하는 인간과 자연 간 ‘비대칭적’ 이분법 속에서, 필자 식대로 표현하자면 ‘근대성이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모든 것을 전부 다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해제에서 필자는 라투르를 따라 모든 것을 전부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역설했고, 이 자리에서 필자는 ‘모든 것을 전부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싶다. 물론 나카자와 신이치와 함께.
사실 마르크스주의조차 ‘무너지는 세계’에 관해, 다르게 말해 ‘문명의 붕괴’에 관해 논하지는 못했다. 이는 라투르의 지적대로 마르크스주의가 인간과 자연 간 비대칭적 이분법, 근대성이라는 이데올로기, 다르게 말해 자본주의의 자장 내에서 사유하고 투쟁했기 때문이다(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나카자와 신이치에게 이는 그리스도교적 ‘삼위일체 구조’의 자장이 될 것이다).4) 물론 이는 인류학이 온전히 수행할 수는 없었던, 자본주의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가능케 했으며, 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가 웅변적으로 보여주듯 그 성과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5)
4) 근대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라투르적 비판으로는 브뤼노 라투르 지음,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참조.
5) 낸시 프레이저 지음,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
하지만 나카자와 신이치가 2001년 9.11 테러에서 큰 충격을 받고 『녹색 자본론』 집필과 카이에 소바주 작업을 시작했듯, 필자 또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과 2022년 이후 인류의 ‘전쟁의 세기로의 진입’(특히 가자에서의 학살)을 목도하면서 큰 충격을 받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나카자와 신이치의 그것을 포함한 인류학적 작업들에 필자가 주목하기 시작한 배경이 이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강조하는 9.11 테러는 1989-1991년 현실사회주의 붕괴가 ‘역사의 종말’이며 이제 인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진입했다는 환상을 단 10년 만에 완전히 박살 냈다. 9.11 테러 이후 인류의 역사는 기후위기로 대표되는 생태학적 재앙의 시대이자 끝없이 반복 확산되는 전쟁의 시대로 진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인류는 철저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이는 무너지는 세계, 문명의 붕괴로밖에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에티엔 발리바르가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비판적 재전유를 통해 ‘인간 종’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역설하듯, 우리는 인류학에 우리의 사유를 의거해야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6) 여기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인류학 일반이라기보다는(물론 인류학 일반에 대한 관심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나카자와 신이치의 독특한 인류학이다.
6)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최원 옮김, 「생명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인간 종」, 『문화과학』 2022년 봄호(통권 제10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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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 신이치, 『녹색 자본론』, 구혜원 옮김, 북드라망,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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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 신이치의 작업 전체를 일이관지하는 그 중핵
『녹색 자본론』이라는 저서, 그리고 『대칭성 인류학』을 포함한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라는 강의록은 쉽게 잘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여기에서 다시 정리하는 건 무의미할 것 같다. 다만,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에 대한 정리는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녹색 자본론』과 『대칭성 인류학』을 포함해,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로 대표되는 나카자와 신이치의 작업을 일이관지하는 그 중핵은 무엇일까? 그에 따르면 약 일만 년 전,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전환되는 시대에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대뇌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인류에게 ‘유동적 지성’, 즉 ‘마음’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로써 인류는 동일성을 인지하고 은유와 환유에 기초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유동적 지성은 ‘합리적 사고’와 ‘마술적 사고’로 구성되어 있다. 다르게 말해, 마음에는 한편으로는 ‘비대칭성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부분과 다른 한편으로는 ‘대칭성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부분이 있으며, 이 두 부분이 ‘복논리’적으로 통합되고 접속되어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탄생한 사유가 바로 레비-스트로스가 강조했던 ‘야생의 사유’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야생의 사유가 대칭성을 그 논리로 취하는 ‘신화적 사고’에 배태되어 있다고 간주하는데, 시간이 흐르며 이것이 (일신교보다는 덜 억압적인) 다신교로 이행하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 신화는 ‘인류 최고(最古)의 철학’인 것인데, 그러나 신화적 사고와 다신교는 이른바 ‘1차 형이상학 혁명’으로 인한 ‘일신교’의 성립과 유동적 지성에 대한 ‘원초적 억압’으로 인해 지양된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대칭성 논리, 야생의 사유, 다신교, 신화 등이 모두 억압되고 라투르가 비판했던 비대칭성의 논리만이 지배하게 되는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뒤 이른바 ‘2차 형이상학 혁명’인 ‘과학혁명’으로 인해 ‘일신교-국민국가-자본주의-과학’의 계열이 확립되고 인류는 ‘압도적 비대칭’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국 2001년 9.11 테러로 압도적 비대칭은 폭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카자와 신이치가 제시하는 이러한 일종의 레비-스트로스적 ‘거대서사’ 속에서 이슬람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에 따르면 이슬람은 1차 형이상학 혁명이 확립한 일신교에 충실하면서 그에 걸맞는 화폐론을 제출한다. 이슬람은 ‘고리’(즉 비싼 이자)를 의미하는 ‘우수라’에 대한 대응으로 ‘일신’(하나의 신, 유일신)을 의미하는 ‘타우히드’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타우히드 화폐론’을 제출한다. 즉 타우히드 구조와 그 화폐론은 증식성(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을 배제하고 거부하면서 1차 형이상학 혁명에 충실했던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우수라에 대한 대응으로 ‘삼위일체의 구조’(셋이 하나가 됨)를 발명하면서 ‘카톨릭 화폐론’을 제출한다. ‘성령의 증식’, 다르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아들의 '산출'(아버지로부터 아들의 태어남)과 성령의 '발출'(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성스러운 영이 생산됨)을 통해 신의 단일성을 역설적으로 위협하면서, 삼위일체의 구조에 기반한 그리스도교는 증식에 기초한 자본주의를 틀어막고 있던 마개를 제거했던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해, 삼위일체의 구조를 통해 우수라에 대응하고자 했던 그리스도교는 성령의 증식이라는 개념을 허용해버림으로써 화폐의 증식이라는 개념, 결국 자본주의 그 자체를 허용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세 그리스도교의 토마스 아퀴나스적인 삼위일체설에 기반한 카톨릭 화폐론은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고전파 경제학은 물론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까지 단절 없이 이어지는데, 이를 증거하는 것이 바로 ‘잉여가치’에 관한 마르크스의 '증식주의적' 논의이다. 그리고 바로 이로부터 『녹색 자본론』, 특히 그 중심인 「녹색 자본론: 이슬람을 위하여」의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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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란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경제학 비판’인 것이다. 원리로서의 이슬람은 거대한 한 권의 살아 있는 ‘녹색 자본론’이다. 자본주의의 ‘타자’는 이 지구상에만 실재한다. 이슬람은 우리의 세계에 있어 잃어서는 안 되는 거울이다.”
― 『녹색 자본론』, 13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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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테러는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 간 압도적 비대칭의 폭발이다. 세계체계론자들이 주장하듯 1989-1991년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당도했다 외쳤던 역사의 종말론자들의 주장이 단 10년 만에 9.11 테러를 기점으로 깨지고 인류가 체계의 붕괴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오늘날, 나카자와 신이치의 ‘압도적 스케일’의 논의는 우리의 흥미를 끌어당기지 않을 수 없다.
나카자와 신이치 사상의 의의
나카자와 신이치 사상의 의의는 무너지는 세계, 문명의 붕괴를 마주한 인류에게 시급히 필요한 급진적인 사상, 마르크스주의의 그것보다 더욱 발본적인 사상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는 점에 있다. 이는 나카자와 신이치가 레비-스트로스적인 구조인류학과 포스트-구조주의를 마주치게 함으로써 라투르로까지 나아가는 가교를 마련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찬찬히 살펴보자.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다르게 말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생산 분석의 핵심은 ‘잉여가치의 생산과 노동 착취’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작업을 더욱 급진화하기 위해서는 이를 인류학적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다르게 말해, 마르크스의 작업은 어떠한 근대성(라투르가 비판했던 의미에서의 허구적 근대성)의 자장 안에 갇혀 있기에 이를 그 바깥으로 꺼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를 그 한계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유의 도구상자가 저 인류학, 그것도 필자의 표현으로는 ‘이른바 새로운 흐름’ 속 인류학이다.7)
7) 여기에서 ‘이른바 새로운 흐름’이란 현재 인문사회과학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유물론이나 존재론적 전회 속 인류학, 라투르 사상 등을 포괄하기 위해 필자가 만든 명칭이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녹색 자본론』에서 강조하듯,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의 그것은 일신교로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 구조 바깥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증식의 문제설정’이라 부를 수 있는 구조의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라투르를 포함한 이들이 주장하듯, 마르크스의 그것을 포함한 ‘근대’의 비판이론들은 ‘근대적 비대칭성’의 함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에게 자본주의의 바깥이란 증식을 가능케 하는 ‘성령’, 상품에 내재한 성령 작용의 제거이고,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의 바깥으로서 이슬람에게 가능한 것이지 그리스도교의 자장 내에서 증식의 문제설정에 따라 사유하는 마르크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나카자와 신이치는 마르크스를 넘어 이를 수행하기 위해 레비-스트로스적 구조인류학과 포스트-구조주의를 마주치게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로써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른바 새로운 흐름’으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가교, 즉 레비-스트로스의 그것을 포함한 현대의 사유를 방기하지는 않으면서 탈현대의 사유로 나아갈 수 있는 가교를 마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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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 신이치, 『대칭성 인류학』,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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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인문사회과학 이론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현대의 사유의 첨점으로서 포스트-구조주의와 탈현대의 사유, 즉 ‘이른바 새로운 흐름’ 간의 마주침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자신의 관점(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맨 앞부분마다 반복되는 지극히 레비-스트로스적인 논의)에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대칭성 인류학』이 명시적으로 라투르로부터의 영감에 기반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작업으로부터 라투르, 그러니까 ‘이른바 새로운 흐름’까지는 단 한 걸음만이 필요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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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배세진
1988년 서울 출생. 정치철학자, 문화연구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의 재구성: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논의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시테 대학교(舊 파리-디드로 7대학) 사회과학대학의 ‘사회학 및 정치철학’ 학과에서 푸코와 마르크스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같은 대학원 같은 학과 정치철학 전공에서 이 논문을 발전시킨 『푸코-마르크스주의와 화폐: 노동-가치, 물신숭배, 권력관계, 그리고 주체화』라는 논문으로 정치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금붕어의 철학: 알튀세르, 푸코, 버틀러와 함께 어항에서 빠져나오기』를 썼으며,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비데 등의 저작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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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신이치 #클로드레비-스트로스 #브뤼노라투르 #이슬람 #인류학 #대칭성 #자본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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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한 <제주 풀무질> 모습(2025. 11. 9). 최근 세화리 식당가(?) 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예전 장소는 현재 까페로 임대 중이다. 대부분이 은행빚이라 임대가 끝나도 걱정이라는 책방지기의 말이 위태롭게 들렸다. 그래도 서점을 옮긴 뒤로 들르는 사람들이 많아 좋다고 맑은 웃음을 풀어준다. 서점 맞은편에 새로 생긴 까페의 '시그니처' 음료도 괜찮으니, 겸사겸사 방문해도 좋겠다. 일곱살인지, 여덟살인지 헛갈리는 서점 반려견의 낮잠을 한번씩 방해하러 가는 것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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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은 성균관대 앞에서 1985년(1986년으로 나오기도 한다)에 연 인문사회과학 서점이었다. 명륜동 터줏대감으로 오래도록 영업을 지속했으나, 1993년 초까지 주인장이 세번이나 바뀌었다. 1993년 은종복에 의해 인수되어 2019년 중순까지 운영되었다. 이후 전범선, 장경수, 고한준, 홍서환 등에 의해 인수되어 이전과는 다른 해방적 기획들을 같은 자리에서 5년간 꾸렸고 지금은 해방촌으로 이전해 운영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제주 풀무질>(은종복)이 세화리 산중턱에 마련되었다가 해변쪽으로 옮겨 지속되는 중이다.
<풀무질>과 <제주 풀무질>을 만나면, 지역적 낙차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급속한 변화와 이행을 온몸으로 부대끼면서도 지속하는 에너지 같은 것을 말이다. 적어도 <제주 풀무질>은 동네사람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치자, 후박, 먼나무 같은 식물들, 이웃 커피숍과 철물점, 건너편 정은김밥집, 굿즈 수집가, 여행 독서가, 그냥 찾은 손님, 빈손으로 나가기 미안해 두툼한 책을 산 독서가 등등이 지속의 에너지였을 것이다. 마음대로 부는 바람도, 앞바다에서 매일처럼 넘실거리는 파도도, 해질녘 노을도, 검은 현무암도 마찬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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