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경제 공황기 노동 계급의 비참한 삶을 다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조지 오웰)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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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 집안의 영리한 소년은, 다른 방법을 통해 자기 위 계급으로 올라가는 수도 있으나 문단 쪽이 가장 일반적이다.”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2010, 22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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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청’이라는 이름표엔 별수 없이 아스라함과 낭만이 얹혀 있어 부르기 망설여지지만 『어떤 동사의 멸종』(시대의창, 2024)으로 ‘노동 에세이 3부작’ 매듭을 지은 한승태의 글엔 ‘문청스러움’이 흐릅니다. “1차 심사 근처에도 못 가보고 떨어진 문학 공모전이 세 자릿수에 육박한다는” 언급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떤 동사의 멸종』의 마지막 챕터명이 ‘쓰다’인데, 여기서 밝힌바 자신을 글쓰기로 이끌었던 결정적인 순간을 함께한 시가 장정일의 「석유를 사러」라는 점 또한 이 짐작이 그리 틀리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갖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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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태 노동 에세이의 가장 큰 특징은 아재 개그로 보이는 유머가 끊이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치 물류 센터의 컨베이어 벨트 위로 짐을 처리하는 일꾼처럼 시종일관 이어지는 비유의 향연은 숨 가쁘기까지 합니다. 어떤 독자는 이 넘치는 비유를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비장함과 결기로 가득했던 1970~80년대 노동 수기와 달리 열악하고 비참한 현실을 가벼운 유머로 전환하는 긍정의 기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보고 싶기도 합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섯 가지 직업에 관한 글은 일종의 ‘공동체의 투병기’로 읽히지만 그 곁엔 늘 유머가 함께합니다. 가끔 피식하는 헛웃음이 새어 나오고, 또 가끔은 기발한 비유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읽다가 ‘쓰다’ 챕터에 이르면 이 과도한 비유가 박민규식 어투를 흉내내는 게 아니라 ‘영차’나 ‘으쌰’와 같은, 일터에서 힘을 내기 위한 추임새에 가까운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한승태는 『어느 동사의 멸종』 마지막 챕터에서 ‘쓰다’라는 동사를 통해 스스로를 메타화합니다. 소설적 자전 수기로도 읽을 수 있는 이 글은 자신의 과거를 소설 형식을 빌려 기록했던 전태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래전에 절판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전태일, 돌베개, 1988)엔 편지, 독서 일기, 사업계획서, 소설, 수기, 앙케트를 비롯해 다양한 형식의 글이 섞여 있는데, 이렇듯 마치 장르 경계를 지우는 듯한 글쓰기 브리콜라주(bricolage)는 여성 노동자 장편 수기에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석정남이 쓴 『공장의 불빛』(일월서각, 1984)이나 장남수가 쓴 『빼앗긴 일터』(창작과비평사, 1984)엔 자전 수기에서부터 기도문, 노랫말, 노동 일지, 편지, 시, 성명서, 고사문, 탈춤 대본, 법정 증언서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채로운 글이 담겨 있습니다. 이들의 글쓰기를 (제도)문학에 미달한다기보다 외려 경계를 넘나드는 유동성과 해방적인 힘에 초점을 맞춰 바라봐야 할 거 같습니다. 이들의 글쓰기는 한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게 아니라 지금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남수는 원풍노조를 기록한 『못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삶이보이는창, 2010)를 함께 썼고 19회 전태일 문학상 생활글 우수작으로 뽑힌 「작은 꿈」(2011)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빼앗긴 일터, 그 후』(나의시간, 2020)를 펴내고 2022년엔 『파문』(강)이라는 단편 소설집까지 출간했지요. 최근엔 한국 여성 노동자 글쓰기에 관한 뜻 깊은 성취이기도 한 『여공문학』(후마니타스, 2017)을 쓴 루스 배러클러프의 초청으로 호주국립대학교에서 머문 8주간의 시간을 바탕으로 한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플레이아데스, 2025)를 펴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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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끈질긴 이어 쓰기는 어려울 때마다 ‘불 꺼진 아궁이에 연탄을 들이듯 누군가 도와주었던 경험’을 통해 배우고 익힌 것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작가 스스로 “내가 받은 연탄들이 아궁이 속 불씨처럼 남아 있어 나 또한 가끔은 누군가에게 연탄 한 장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품기도 했다고 하지요. 그러니 “불씨 이어 달리기”(『빼앗긴 일터, 그 후』, 175쪽)라고 명명한 경험이 이어 쓰기의 구체적인 동력인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동 에세이, 혹은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는 제도적인 문학에 가닿고자 한 글쓰기가 아니라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기록함으로써 희미한 존재의 목소리를 ‘역사적 합창’으로 증폭시켜온 역사를 가리키는 이름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 글쓰기를 ‘다른 문학’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게 부름으로써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어 쓰고 있는 이름들을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곁에 일하는 사람, 어쩌면 계속 일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두 번째 글쓰기’를 놓아두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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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노동자 희정은 노동에 관한 글이란 곧 몸에 새겨진 글자를 읽는 일이라고 합니다. 희정이 쓴 『베테랑의 몸』(최형락 사진, 한겨레출판사, 2023)은 곁에 있지만 눈여겨보지 않았던 일꾼이 어떤 ‘몸’으로 살아왔는지를 찬찬히 들여다본 책입니다. 이 책에서 부서지고 닳은 몸에 깃든 이야기를 듣노라면 일꾼의 몸이야말로 어렵게 살아온 힘든 나날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일구어온 애씀이 새겨진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스터즈 터클의 『일』(노승영 옮김, 이매진, 2007)에서 뽑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1960~70년대 미국사회 구석구석에서 살아가는 133명의 일꾼 목소리를 담은 이 책을 스터즈 터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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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주제로 한 이 책은 본질적으로 ‘폭력’에 대한 책이다. 여기에는 신체에 대한 폭력뿐 아니라 영혼에 대한 폭력도 포함된다. 이 책은 상처와 사고, 말다툼과 주먹다짐, 신경쇠약과 화풀이에 대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일상의 모멸감을 다루고 있다.
―스터즈 터클, 『일』,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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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베테랑의 몸’을 가리키는 다음과 같은 문장과 공명합니다. “베테랑이 된다는 것은 몸에 손상을 입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181쪽) 숙련자를 가리키는 베테랑이라는 이름에서 그간 일궈온 터를 존중하려는 눈길을 읽을 수 있습니다. 베테랑은 살아가기 위해 기술을 몸에 붙이는 동안 “손가락이 굽고, 허리가 망가지고, 인대가 나간다. 눈이 시리고, 귀가 얼얼하고, 속병이” 듭니다. 그러니 베테랑이란 서서히 병드는 몸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한 셈입니다. 베테랑 곁에서 희정은 다음과 같이 씁니다. “나는 인간의 뼈와 관절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운다.”(2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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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노동을 쓰는 나의 노동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단 『두 번째 글쓰기』(오월의봄, 2021)에서 희정은 노동을 말할 때 노동에 관해서만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자연스레 몸에 대해 말하고, 힘에 대해 말하고, 권리와 존엄에 대해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글쓰기』는 그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또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에 대한 자기 심문이면서 “무너져 내리는 동시에 다시 세워지는 사람들의 세계”(30쪽)를 탐색한 일지이자 “끊임없이 말하고 끊임없이 들으며 서로를 지켜내어 생존하게 하는”(44쪽) 기록 노동에 관한 창작론이기도 합니다. 희정의 글쓰기론은 낯선 곳까지 가서 ‘흔한 이야기’를 듣고 오는 기록자의 한계뿐만 아니라 질문과 답변이 아닌, 말의 주고받음을 통해 서로가 응답을 기다리는 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일터에서, 이 세상에서 “유독 더 보이지 않는 사람”(희정, 『뒷자리』, 포도밭출판사, 2024, 182쪽)들 곁에서, 싸움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을 옮기며 이어지는 글쓰기를 희정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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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란 상대의 손에도 흙 묻히는 일이라는 것. 어떨 때는 잔뜩 흙이 묻은 상대의 손에 내 손을 가져가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략) 말하는 이의 세계와 기록자의 세계가 서로 얽혀 빚어진 기록이 나올 때까지.”
―희정, 『두 번째 글쓰기, 3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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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잔뜩 묻은 타인의 손과 함께 만드는 그릇’으로 표현된 희정의 글쓰기론을 저는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는 ‘불씨 이어달리기’이자 ‘다른 문학’을 일구는 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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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대성
비평가.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은 부산 장림에서 살림하며 1인 출판사 <곳간>을 꾸린다. 대학과 문단 안에 머무르지 않고 제도 바깥으로 나와서 2013년부터 지금까지 매달 <문학의 곳간>이란 모임을 열고 있다. 2015년부터 글쓰기 모임을 꾸리며 『문이야 무의야』(촉, 2016)와 『살림문학』(곳간, 2024)을 기획하고 함께 썼다. 이런 궤적을 따라 비평집 『무한한 하나』(산지니, 2016)와 『대피소의 문학』(갈무리, 2019)을 펴냈다. 다음 주에 작은 책, 『코로만 숨쉬기』(곳간, 2025)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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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태 #어떤동사의멸종 #희정 #베테랑의몸 #두번째글쓰기 #노동자글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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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사회적 분위기와 계절, 기후에 따라 이루어지는 물듦이, 또 번짐이 이루어졌을 테지만, 어쩐지 병이 깊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계엄과 극우의 난동 거기에 맞선 투쟁이 어디에 이른 것인지 되묻게 된다. 농민들과 노동자들과 여성들과 퀴어들과 지역들은 '정상(국가)화'의 논리와 보편적인 정치 문법 아래, 식민화되거나 비가시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형도가 열아홉에 쓴 시였다던가. 「병」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입속에 궁글려본다.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사진_부산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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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이 채워지는 계절이라는데, 많은 예술가들은 이 시기가 되면 ‘잔고’가 위태롭다. 물론 넉넉한 적도 별로 없다. 1년 단위로 이루어지는 예술 지원 시스템에 기대를 하지만, 썩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만 그런 건 아니다. 1년 한정으로 이루어지는 각종 연구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국가 행정과 회계 주기에 연동된 예술이나 연구 지원 프로그램은 창작자와 연구자의 지속가능성을 1년 주기로 희박하게 연장하는 것에 가깝다. 어떤 지역의 경우엔 2년 연속 지원이 안 되는 프로그램으로 인해 신진 예술가들은 이듬해 살림의 예측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있다고도 했다. 곳간을 비우면서, 이력‘만’을 채우는 역설이 현실화되는 것이 바로 이 시기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위기가 도래하는 시기에도, 도리어 가시화되지 않는 돌봄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가령, 어떤 연구자는 자신은 적어도 생계에 큰 염려가 없어 이 귀한 기회를 다른 연구자가 받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지원 사업에 서류를 내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40대 예술가는 예술가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예술로’ 사업에 마찬가지의 이유로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귓속말을 듣기도 했다. 사실 저 연구자와 예술가 모두 살림과 형편이 썩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자신이 놓여 있는 현장의 동료들을 생각하는 저 애씀만이 소리 소문도 없이 노랗게 물든 은행잎으로 수북이 쌓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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