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의 시대와 궐기하는 ‘나’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내 일기 이곳저곳에 빨간 취소선을 긋고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겨두었다. “일기에서 모든 문장의 주어는 기본적으로 ‘나’야. 그러니까 ‘나는’이라는 단어를 자꾸 쓸 필요는 없단다.” 이럴 수가! 나는 내가 ‘나는’을 남발하는 사람이라는 점에 충격받았다. 수치심을 느꼈다. ‘일기’라는, 이미 ‘나’투성이인 세계에서조차 ‘나’를 못 잃는 ‘나’라니 너무 후지지 않은가. 대학에서 줄곧 들은 충고도 같은 맥락이었다. ‘네 욕망을 사회화해라!’라는 주문은 귀했지만, 그건 세계의 중심을 ‘나’라고 생각하는 유아론적 태도, 그러니까 ‘자의식 과잉’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라는 준엄한 질책이기도 했다.1)
1) 이 일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쓴 적이 있다. 오혜진, 「이심지✕이심지, 모르는 사이」, 이심지, 『오래된 습관』, 2021. (독립출판물)
그런데 요즘 내 책장 한 줄을 가득 채운 것은 부끄러움도 없이 ‘나는’을 외치며 궐기하는 책들이다. 곽예인, 김원영, 김지우, 들개이빨, 매기 넬슨, 심미섭, 아일린 마일스, 앤 츠베트코비치, 영이, 요하나 헤드바, 유성원, 이반지하, 이연숙, 제인 갤럽, 하은빈, 호영……. 바야흐로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를 맞아 에세이들이 “폭발” 중이고,2) ‘나는’에 대한 애호가 더는 촌스럽거나 한심한 일이 아니란다. 이제 이 재기 넘치는 ‘나’들의 무수한 글쓰기 실천을 ‘에세이’라는 수상한 범주에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친숙한 듯 낯선 글쓰기를 이해해보고자 이 글을 쓴다. 소위 ‘소수자 에세이’라고 통칭되는 부류의 책들 말이다.
2) 문다애, 「예스24, 2018년 베스트셀러 분석… “에세이·북한·페미니즘”」, 『아시아타임즈』, 2018. 12. 4; 정고은, 「‘페미니즘 대중화’ 시대, 페미니스트 독서/출판의 향방—‘여성 에세이’를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57, 한국여성문학학회, 2022.
‘나’를 드러낸다는 점 말고도 에세이 장르에 대해 말할 때 강조해야 할 특징은 더 있다. 몽테뉴가 처음 자신의 글들에 ‘에세Les Essais’라 이름 붙였을 때, 그것은 ‘노력한다’, ‘시험한다’, ‘시도한다’는 뜻이었다.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인 브라이언 딜런은 ‘에세이즘’을 “시험해보고 가정해보는 태도”이면서 동시에 “생각 속에서, 글 속에서, 삶 속에서 뚜렷한 윤곽을 그리는 습관”이라고 쓴다. 그에게 에세이란 “이런 두 충동의 배합, 즉 위험이나 모험에의 충동 그리고 완결된 형식이나 미적 완성에의 충동 사이에서 흔들리는” 글이다.3) 요컨대 매력적인 에세이라면 단지 ‘나’를 드러낼 뿐 아니라, 그런 글쓰기를 수행한다는 것에 대한 모종의 태도와 자의식을 가질 것이다.
3) 브라이언 딜런, 김정아 옮김, 『에세이즘』, 카라칼, 2023, 30~31쪽.
매혹적인 에세이 혹은 에세이의 매혹을 떠올릴 때, 매기 넬슨과 아일린 마일스는 이미 그 분야에서 정평이 난 작가들이다. 후술하겠지만, 매기 넬슨은 근래 ‘자기이론’, ‘자기 쓰기’를 다루는 거의 모든 저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2015년에 발표된 『아르고호의 선원들』은 2019년에 번역·출간된 『블루엣』(2009)에 이어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된 그의 대표작이다. 반면, 내가 『낭비와 베끼기』(2020)의 저자 아일린 마일스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2010년 즈음이다. 당시 스웨덴 의회에서 극우 정당의 의회 진출을 저지하려는 예술가들은 조이 레너드가 작성한 선언문 「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를 낭독했다. 이 선언문이 바로 1992년 미국 대선에 출마한 시인 아일린 마일스를 지지하기 위해 써진 것이다. 지금도 내 방 한쪽 벽면에는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I want a dyke for president.”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 선언문 포스터가 부적처럼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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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e Leonard, <I want a president>, 1992/2018. Ink on onion skin paper. @Zoe Leona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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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붓고 낭비하고 베끼고 갱신하기
매기 넬슨은 ‘아르고호의 선원들’이라는 근사한 제목을 롤랑 바르트의 저서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서 따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가지러 갈 때 타고 간 배가 아르고호다. 롤랑 바르트는 이 배를 구성하던 부품들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함으로써 배의 이름이나 모양을 바꾸지 않고도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선박으로 탈바꿈된 것에 착안해 이를 ‘대입’과 ‘명명’의 알레고리로 삼았다. 새 부품들이 동일한 명칭 아래 조립된 결과, 배의 ‘기원’은 사라진다. 아르고호는 “자신의 형식 이외에 다른 자기동일성을 갖지 않은 대상”4)이다. 매기 넬슨은 이 알레고리를 연인에 대한 사랑의 성격을 논할 때도 쓰고, ‘퀴어’의 의미를 규정할 때도 참조하며, 자신의 글쓰기를 설명할 때도 활용한다.
4) 롤랑 바르트, 이상빈 옮김,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동녘, 2013, 62~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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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 넬슨, 이예원 옮김, 『아르고호의 선원들』, 플레이타임,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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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마일스의 『낭비와 베끼기』에도 아르고호의 알레고리를 연상케 하는 상황이 등장한다. 롤랑 바르트는 아르고호를 언급하면서 각각 파리와 시골에 있는 자신의 두 작업장을 떠올린다. 그는 두 공간에 똑같은 물건이 전혀 없음에도 공간의 구조가 같다는 점에서 양자가 공통적이라고 말한다.5) 『낭비와 베끼기』에서 아일린 마일스가 하는 일도 바로 그것이다.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위치한 임대료 안정 아파트에서 42년째 살고 있던 그는 집주인에 의해 강제로 퇴거당할 위기에 놓인다. 결국 그 집을 떠나기로 결정한 뒤 그가 착수한 일은 텍사스에 있는 자신의 또 다른 집 마당에 뉴욕 집과 똑같은 모양의 오두막을 짓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해온 일, 즉 “베끼기”(44)의 연장이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트리의 바늘잎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베껴 그리며 마음이 편해졌던 것처럼, 그는 뉴욕 집과 비슷한 오두막을 텍사스 집 마당에 베껴 짓되 그곳에 삼각형 창문을 하나 냄으로써 비로소 ‘괜찮아진다’.
5) 롤랑 바르트, 위의 책, 63쪽.
매기 넬슨이 자신을 표현하기에 언어는 충분하다고 믿고 끝없이 말을 “쏟아붓”(76)는 것, 아일린 마일스가 글쓰기(집 짓기)에 시간과 자원을 충분히 “낭비”(39)하는 것은 모두 이들의 퀴어한 존재방식과 관계있다. 아니, 쏟아붓고 낭비하고 베끼는 행위가 곧 이들을 ‘퀴어’로 만든다. 무슨 말인가.
『아르고호의 선원들』에서 매기 넬슨이 하는 일은 ‘(비)규범성’에 대한 탐구다. 책의 초반에서 그는, 강도 높은 BDSM 아트를 선보이던 캐서린 오피가 1993년작 「자화상/커팅」에서 동성연인과 이룬 단란한 가정에 대한 열망을 재현하는 것을 보고 즉시 동성애규범성homonormativity6)을 떠올린다. 그가 보기에 그 작품은 “삼각 치마가 두 개인 걸 빼곤”(21) 이성결혼만을 인정하겠다는 취지의 법안인 주민발의안 8호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넬슨과 그의 연인 ‘해리 도지’는 결국 주민발의안 8호가 통과되기 직전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6) 가정생활 및 소비에 입각한 사사화되고 탈정치화된 동성애자 문화를 약속함으로써 이성애규범성을 고수하고 지지하는 정치. 리사 두건, 한우리·홍보람 옮김, 『평등의 몰락―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가』, 현실문화, 2017, 123~128쪽.
서사 전반에 걸쳐 상세히 서술되는 것은 도지의 트랜지션 과정과 병치되는 비트랜스젠더 여성인 매기 자신의 임신 과정이다.7) 여기에 도지의 어머니가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 끝내 좁혀지지 않았던 넬슨과 그의 의붓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넬슨이 도지가 낳은 자식의 의붓어머니 역할을 수행하는 경험이 겹쳐진다. 자못 규범적으로 보이는 비트랜스젠더 여성의 임신과 출산과 모성도 ‘퀴어한 것’일 수 있는지, 이렇게 구성된 새로운 친족관계가 언제 어떻게 기존 가족제도를 모방하거나 혹은 래디컬한 맥락을 생산하는지를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끊임없이 질문한다.
7) 이에 대한 상세한 분석으로는 로런 포니에, 양효실·김수영·김미라·문예지·최민지 옮김, 『자기이론—자기의 삶으로 작업하기』(마티, 2025)의 3장 참조.
한편, 아일린 마일스는 자신이 아이도 직업도 원하지 않았기에, 즉 그의 “퀴어 정체성”(39) 덕분에 글쓰기에 낭비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쓴다. 다만 “너무나 대놓고 레즈비언”(142)인 그에게 ‘레즈비언’이라는 명명 혹은 정체성은 전혀 “섹슈얼한 미스테리”(142)로 취급되지 않는다. 『낭비와 베끼기』의 말미에 이르면, 아일린 마일스는 오랫동안 보관해온 자신의 원본 원고뭉치가 들어 있는 상자들을 분실한다. 이는 “내 글쓰기”(120) 혹은 “당신의 글”(121)이라는, 소유권을 가려낼 수 있는 명백한 범주로 자신의 글쓰기가 환원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그리하여 자신의 글로부터 끝내 ‘사라지고’ 싶어 했던 그에게 무척 어울리는 결말이다. 뉴욕에 있는 원본 아파트를 “복제”(78)한 것이되 창문(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새 오두막, 그것은 ‘나’라는 ‘원본’을 기꺼이 분실하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현재에 도달”한 저자의 상황에 대한 기막힌 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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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을 이론화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최근 매기 넬슨과 아일린 마일스의 이름을 중요하게 언급하는 분야는 단연 ‘자기이론’ 연구다. 『자기이론』의 저자 로런 포니에는 ‘자기이론’이 1960년대 페미니스트 글쓰기와 행동주의의 유산을 계승한 것으로, 자신의 신체화된 경험을 이론화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수행적 실천이라고 말한다. 즉 ‘자기이론’에서 ‘자기’와 ‘이론’은 동시에 문제화된다. 페미니스트/퀴어 인식론이자 방법론으로서 ‘자기이론’은 여성/소수자의 신체와 경험을 ‘이론’의 대상에서 배제해온 남성중심적·이성애규범적·식민주의적 지성사를 심문에 부치고, ‘이론’에 부여된 기존의 권위를 질문한다. 그런 점에서 누가, 무엇이 이론을 구성하는지를 따져 묻는 자기이론 작업은 규범적인 서사적 관습을 따라 구성되는 ‘회고록’과는 다르다. 자신을 종종 “회고록 저자 드랙”(174)을 한다고 소개하는 매기 넬슨은 ‘자기이론’이라는 명칭을 자신의 작업에 처음 도입한 인물로 회자된다.
로런 포니에는 매기 넬슨의 글쓰기를 ‘자기이론’의 견본으로서 상세히 분석한다. 매기 넬슨이 애호하는 ‘인용’이라는 장치가 특히 주목된다. 인용은 ‘자기이론’에서 ‘자기’가 타인의 삶과 긴밀하게 연루돼 있음을 지시하는 표식이고, 특히 인용의 대상이 저명한 백인 남성 이론가들이 아니라 자신의 연인 도지 및 넬슨에게 깊은 영감을 준 “복수 젠더 어머니들”(91)이라는 점에서 ‘이론’이 지닌 남성중심적 권위를 전복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8)
8) 로런 포니에, 앞의 책, 221~284쪽.
그러나 이런 질문도 하게 된다. 자기이론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의 삶으로 작업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이 글 도입부에서 나열한 수많은 에세이의 저자들은 서로 다른 만큼이나 꽤 동류로 여겨지기도 한다. 자신의 경험과 감정이 유력한 이론적 대상이자 자원일 수 있다는 확신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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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마일스, 송섬별 옮김, 『낭비와 베끼기—자기만의 현재에 도달하는 글쓰기에 관하여』, 디플롯,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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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와 베끼기』에 서술되는 아일린 마일스의 흥미로운 집 짓기 일화에서 놀라운 것은 단지 “낭비”와 “베끼기”의 마술로 인해 가능해지는 ‘나’로부터의 탈출과 그것이 함의하는 퀴어한 존재론만은 아니다. 노동계급 출신으로, 42년째 뉴욕 임대료 안정 아파트에 살지만 텍사스에 또 다른 집이 있는 아일린 마일스, 젊은 날에 “좋은 시” 몇 편을 써 문단에서 인정받고, 쉰 살 즈음에 샌디에이고의 한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는 아일린 마일스, 대학으로부터 집과 이사비용과 파트너의 일자리를 제공받는 아일린 마일스, 임용되기 전, 대학에 자신의 원고 아카이브를 판매하려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집 수리를 계획하는 아일린 마일스, 대학에 원고를 판 돈으로 부를 축적하는 이에 대한 자조적 농담마저 적어두는 아일린 마일스.
아일린 마일스가 집 짓기(글쓰기)에 많은 시간과 돈을 탕진하고 그것을 ‘퀴어한’ 존재방식으로 의미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실은 미국 아카데미와 문단에서 부를 축적하는, 꽤 기발하지만 동시에 무척 규범적인(자본화된) 프로세스를 목도하는 일과도 겹쳤음을 나는 한동안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일린 마일스는 자신의 글로부터 사라지는 일에 성공했을지언정 자신의 현재를 의심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은 회피한 것이 아닐까. 과연 자기이론은 자기의 (말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한) 현재를 정당화하는 작업으로 귀착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자기이론에는 과연 자기를 배반하는 ‘구멍’이 마련돼 있을까. 매기 넬슨은 자기 경험을 펼쳐 보이는 일이 왜 흥미로운지를 서술하며 들뢰즈와 파르네의 대화를 빌려 이렇게 적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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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험과 생각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와는 별개로 (…) 내 넘쳐나는 기득권도 선뜻 시인하고 싶다. (…) 본인의 군림을 배반하고 본인의 성, 계급, 본인의 다수자성을 배반하기 위해서 말고 달리 글을 쓸 이유가 있나요? 그리고 또한 글쓰기를 배반하기 위해서 말고요.
―『아르고호의 선원들』, 15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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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오혜진
문학평론가. 서사·표상·담론의 성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일에 관심 있다. 평론집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을 펴냈다. 『비평 포럼』, 『연구자의 탄생』, 『원본 없는 판타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등을 동료들과 함께 썼고, <한겨레>와 <씨네21>등에 칼럼을 연재했다. 대학에서 문학비평 및 문화이론을 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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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이론 #에세이 #매기넬슨 #아일린마일스 #아르고호의선원들 #낭비와베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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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계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번 추석에도 휘영청 밝은 달이 뜰 것이다. 파도는 칠 것이고 때맞춰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라, 기도문에 가깝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식상한 풍경조차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모두가 추석 연휴를 유일한 것으로 누리시기를, 허기도 채우시기를, 힘겨움을 덜어내시기를, 고통도 기쁨도 함께 나누는 기회를 가지시기를,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만드시기를,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멈추고 쉬시기를, 복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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