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목소리>
최근 재일조선인 감독인 박수남의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광복절에 공중파에서 상영되는 등 널리 알려지는 중이다. 박수남은 재일조선인 2세로 1958년 고마츠가와 사건이라고 불렸던 재일조선인 청년 이진우의 사건 이후, 그를 구명하는 과정에서 서신 교환을 하고 이 사건이 전후 식민주의의 문제이자 일본 내 민족차별 문제임을 알리고자 했다. 당시 귀국사업으로 ‘좋은 재일조선인’의 이미지가 필요했던 조총련은 박수남의 활동을 마땅치 않아 했다. 결국 그녀는 조직에서 배제된다. 그 뒤 그녀는 히로시마 조선인 원폭피해자, 오키나와 조선인 위안부, 나가사키 강제동원 피폭자 등 전후 식민주의에서 망각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는 작업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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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책이나 글로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중반이었다. 카메라로 그들의 목소리를 담기 시작한 것 역시 1986년, 무척 이른 시점이었다. 1967년 처음 히로시마에 피폭 조선인들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 누구도 자신이 피폭자라고 선뜻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원폭슬럼’이라고 불리는, 피폭자들이 다수 거주하던 곳에 살던 조선인들의 삶은 “깊은 침묵과 가난뿐”이었다고 박수남은 회고한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피폭된 조선인 여성의 대화가 몇 분간 이어진다. 예컨대, ‘신세타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녀들의 대화는 이러했다. 히로시마 출신 여성이 ‘나이가 들수록 꾸며야 돼’라며 화장을 하자, 피폭으로 눈이 불편한 나가사키 출신 여성이 자신은 한 번도 화장을 제대로 해본 일이 없다며 화장품 냄새라도 맡아보자는 대화로 이어진다. 박수남은 그들이 조선어로도, 일본어로도 “말이 잘 안 나오는” 상황, 즉 스스로의 생애를 쉽사리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아직도 자료화를 기다리고 있는 엄청난 양의 필름 옆에서 그녀는 “떨리는 몸, 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던 건 카메라뿐”이라며,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그녀들을 영상으로 기록했는지 속삭인다.
박수남이 그랬듯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에서도 목적론적인 민중사, 민중 중심 역사상에 대한 평가 속에서 조직되지 않은 하층계급 스스로의 목소리를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구술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그 이후 20여 년이 흐른 현재, 축적된 구술자료의 규모나 관련 연구서의 양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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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구술사', 일본의 '생활사'
하지만 시선을 구술사 연구의 본령, 즉 구술자와 면담자 간의 대화라는 ‘면담 상황’ 속에서 구성된, 구술자가 과거에 경험했을 개연성 높은 체험들에 대한 ‘현재적 해석’이란 주제로 옮겨 보면, 한국에서 구술사 연구가 놓치고 있거나 좀 더 주목해야 할 문제들도 눈에 띈다. 예컨대 수집된 구술자료에 비해 이를 연구로 확장하는 흐름이 예전보다 잦아들고 있다든지, 여전히 구술자료를 문헌자료로 기록되지 않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보조자료 정도로 이해하는 학문 분야도 여전히 많다든지,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도 안고 있다.
이 점에서 기시 마사히코와 동료 연구자들이 2016년에 쓴 일본 생활사 연구, 더 나아가 필드워크, 참여관찰, 생활사란 3가지 주제의 역사, 쟁점, 방법을 정리한 『타자 이해의 사회학』(호밀밭, 2025)은 일본에서 구술사의 고민을 담은 책이다. 물론 일본의 구술사도 방향은 여러 가지다. 예를 들어 국립정책연구대학원대학(GRIPS)의 “C.O.E. 오럴 폴리시 연구 프로젝트”란 5년간의 프로젝트는 약 180명의 정치인을 대상으로 1,200회 이상의 인터뷰, 총 2,400시간의 기록 자료를 구축했는데, 이런 방식의 다소 제도화된 흐름도 공존한다. 이 책은 ‘생활사’라는 문제의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본 학계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는 3부 ‘생활사’를 중심으로 주요한 내용을 소개하며, 한국과 유사하면서 상이한 문제의식을 정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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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생활사나 타자 등의 용어에 대해 소개하며 출발을 해보자. 생활사 조사의 목적은, 어떤 사회 문제나 역사적 사건의 당사자나 관계자의 인생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거시적인 역사와 사회구조에 연결하고, 거기에 숨겨진 ‘합리성’을 이해하고 기술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흥미로운 용어가 생활사 감각이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것을 ‘생활사적 감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생활사 조사를, 혹은 좀 더 일반적으로 질적 조사를 채택하는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큰 목소리’보다 이름 없는 일반인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서 배우고, 그리고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183쪽) 한국 구술사 연구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밑으로부터 역사’라든지 ‘서발턴의 목소리’ 등의 문제의식과 유사한 개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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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구술 자료는 없다'
다음으로 ‘면담 상황’이란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구술면담은 구술자가 자기 생애를 독백하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술자가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서 면담자를 대상으로 대화하는 과정이다. 구술자는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을 법한 개연성이 있는 경험을 이야기라는 형태로 면담자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술자료는 과거 경험의 '모사'가 아닌, ‘현재화된 해석’이다. 문헌학적 실증을 강조하는 연구자들은 아직도 구술자료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라고 불신하지만, 이런 시각은 구술자료의 다층성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오는 지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아의 구술사학자 포르텔리의 유명한 말은 이 책에도 동일하게 인용된다. 잠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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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자료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 그대로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상과 상징, 소망의 표현으로 사실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못된’ 구술 자료 같은 것은 없다. 이미 확립된 문헌적 사료 비평의 기준에 따라 사실적 신뢰성을 확인하고 사실에 근거하여 입증하면(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료라도 필요한 일이다), 구술사의 다양성은 사실적으로는 ‘틀린’ 진술도 심리적으로는 ‘진짜’라는 데 있다.
―기시 마사히코, 이시오카 토모노리, 마루야마 사토미 공저, 김주현 옮김, 『타자 이해의 사회학』, 호밀밭, 2025. 202쪽.(이 책의 인용은 전자책 기준임을 밝혀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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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기시 마사히코가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처럼, 생활사 연구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는 단순히 일본의 옛 문화와 관습 자체에 관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강한 관심이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청취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의 내용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러한 청취의 현장에 함께함으로써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이야기의 내용과 함께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을 것입니다.”(188쪽) 면담 상황은 문서에 기록되지 않은 정보만을 정리하기 위한 시공간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면담자조차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는 유동적인 시간이다. 기시 마사히코의 중요한 지적을 다시 인용하면, “생활사 조사는 우선 상대방의 이야기를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현실입니다. 다만 이 현실은 이야기하는 방식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진실이지만, 동시에 일회성이고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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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의 이야기를 '믿기'
연구자는 구술자가 진실을 이야기하는지를 ‘팩트 체크’하는 감별사가 아니라, 과거 경험에 대해 구술자가 왜 자신에게 지금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지 질문을 던지며 구술자의 서사와 경험을 듣고 믿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기서 네 번째로, 사례의 수라는 문제 혹은 대표성이란 문제도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다. 가끔 구술면담에 기초한 논문에 대해, “사례 수를 늘려야 대표성이 있지 않나…”란 엉뚱한 이야기를 듣곤 한다. 하지만 구술사 연구나 생활사 조사에서는 숫자를 기반으로 한 양적 조사와는 달리 ‘사례의 수’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해 보면, “양적 조사에서는 오차나 오류(bias)를 배제하기 위해 적절한 ‘표본 규모’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생활사 조사에서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도 논문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단순한 ‘법칙’보다는 복잡한 서사의 해석이 중시되기 때문에 숫자의 많고 적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176쪽)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구술자/생활사 연구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런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모집단의 몇 퍼센트가 이탈했는가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양적 조사의 과제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생활사 조사에서 필자가 하고 싶은 것은 오키나와의 역사와 사회구조의 데이터를 배경으로 많은 분이 이야기한 이러한 ‘이탈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입니다.”(234쪽) 기시 마사히코가 높이 평가하는 나카노 타카시의 『구술 생활사 - 어떤 여인의 사랑과 저주의 일본 근대口述の生活史 - 或る女の愛と呪いの日本近代』(御茶の水書房, 1995)처럼 미즈시마의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복잡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만주, 조선 등 일본의 식민지를 옮겨다니며 결국 기업 단지의 어촌에 이르는 마츠시로라는 여성의 생애사 안에 일본 사회 근대화의 발자취가 담겨 있는, 앞서 기시 마사히코의 말을 변형하자면 ‘근대화의 이야기’로서 의미가 크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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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말하는가 vs 어떻게 말하는가
끝으로, 이 책의 생활사 논의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인 ‘무엇을 말하는가 vs 어떻게 말하는가’, 즉 구술자의 경험과 서사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둘러싼 방법론적 문제를 소개하고 싶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구술사/자료 해석의 방법론이 소개되던 시점에 구술자의 경험과 서사 가운데 어디에 무게를 두고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논의들- 예를 들어서 이야기된 생애사, 경험된 생애사 간의 관계라든지 - 이 전개되고, 사례 연구들도 제출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이 넘어서면서 생애사나 자료의 해석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전개되지 않는 듯싶어서 다소 안타까웠다. 그런 와중에 이 책에서는 이야기와 서사의 이해 방식에 대한 일본에서의 논의를 제법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라이프스토리 인터뷰ライフストーリー・インタビュー』(せりか書房, 2005)의 저자 사쿠라이 아츠시의 방법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사쿠라이에게 생활사란 구술자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면담자/연구자가 구술자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이야기가 ‘탄생하는 순간’으로서의 대화 장면 - 한국에서 ‘면담 상황’이라고 불리는 - 을 기록하라고 권고하며 이런 방법을 ‘대화적 구성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사쿠라이는 그간 연구자들이 특정한 사회적 범주를 기반으로 연구자만을 위해 만들어낸 스토리에 대해 “이것들은(피해자로서/해방운동의 주체로서 부락민상-인용자) 모두 ‘부락’이라는 사회적 범주를 전제로 한 <조사자의 스토리>”라고 비판한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대화적 구성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활사의 이야기를 ‘사실’과 분리한다. 구술자의 이야기를 과거의 경험적 사실로 파악해 버리는 것은 구술자의 서사가 지닌 다양성, 복잡성, 그리고 ‘서사성’이 가진 힘을 약화시킨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논쟁 지점은 대화적 구성주의에서 구술자의 서사는 더 이상 실제 생애사의 궤적이나 경험이 아닌, 스토리 그 자체로만 이해된다는 점이다. 나는 구술생애사에서 구술자의 이야기를 과거의 사실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적이지만, 그렇다고 구술자의 이야기를 개연성 있는 과거 경험적 사실로 이해해선 안 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긴 어렵다. 구술 내용을 이야기로만 이해할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고 기시 마사히코는 지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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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의 말은-인용자) 픽션이 되는데 그 연구는 끝없이 ‘이야기 연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오키나와나 피차별부락, 혹은 미혼모의 빈곤, 청소년 문화의 변용, 환경문제, 새로운 사회운동 등 특정 조사 대상을 분석하는 사회학자는 얻어진 이야기를 ‘데이터’, 즉 어떤 실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취급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한낱 서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특정 대상에 대한 조사 연구가 불가능합니다.
―『타자 이해의 사회학』,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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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나는 기시 마사히코의 다음과 같은 생활사-구술생애사 이해방식에 동의하는 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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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와 사실은 연구 대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둘 다 필요하다는 당연한 결론입니다. 결국 생활사를 해석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이야기를 허구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성급하게 사실 그 자체로 연결하는 것도 아니고, 그 ‘경험의 전체’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하나만 존재하지만, 그 이야기 방식은 무한하다’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단 하나의 현실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지키면서, 그 현실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타자 이해의 사회학』,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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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후에 본토로 간 오키나와 남성은 첨엔 도쿄로 밀항한 것을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라는 서사로 설명하다가 나중에는 ‘오키나와에서의 트러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적어도 1972년 일본 본토로 복귀되기 전에 ‘외국’이었던 오키나와에서 밀항까지 해서 도쿄로 이동한 한 남성의 ‘경험’ 자체는 사실로 존재한다. 동시에 본토와 분리된 채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오키나와 사회에서 다양한 ‘트러블’이 발생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다. 이렇듯 구술자의 서사만으로는 제대로 타자의 경험과 맥락을 이해할 수 없다. 생활사/구술생애사의 서사를 사실과 분리시키는 주장의 문제는 분명한 것이다.
『타자 이해의 사회학』은 생활사, 타자, 서사와 경험/사실 그리고 생활사 감각이라는, 한국 구술생애사 연구에서도 공감하고 논의 중인 중요한 문제들을 담았다. 그 이름이 생활사로 불리건, 구술생애사라고 지칭되건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를 귀하게 여기는 관점과 태도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기시 마사히코가 생활사 조사의 매력이라고 언급한 멋진 표현으로 책의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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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해 점차 이야기 자체에 이끌려 생활사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때 귀를 쓰다듬는 바닷물의 느낌, 멀리서 들려오는 거품 소리, 배에 가해지는 무거운 수압의 감각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타자 이해의 사회학』,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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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근현대 구술사를 전공하고 있다.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87년 6월 항쟁』 등 저작이 있다. 동아시아에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기억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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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사 #구술생애사 #구술사 #타자의이해 #기시마사히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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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침, 사랑 또는 시간의 해방
from. 김선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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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과 연인과 시인은 모두
상상력으로 단단히 뭉쳐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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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알려지지 않은 것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시인의 펜이 형상으로 바꾸어
아무것도 아닌 헛것에 이 지상의 주소와 이름을 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선형 옮김, 『한여름 밤의 꿈』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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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속도에 저항하는 독서
난도질당한 텍스트의 파편들을 합성해 ‘창조’하고 ‘혁신’하는 AI/AGI가 우리 앞에 내던진 문제는 시간이고,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의미다. 컴퓨터만큼 빠르게 진화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불안, 인간을 기계와 경쟁하게 하는 기묘한 돌연변이 진화론이 우리를 무한정 가속되는 자기계발의 트레드밀로 내몬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성을 포장한 가짜 목표를 내세워 인간적인 것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억압적 경제담론이다. 비인간의 속도를 인간이 따라잡을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 무너지고 부서지는 몸이야말로 '사람'이라고, 허공에라도 대고 외치고 싶었다. 주어진 유한한 시간으로 무한한 연산의 가속도를 따라가라는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고 싶었다. 시대의 속도에 발칙하게 거역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이 무도한 시간성을 끊어 사람의 시간이 멈출 틈을 열어줄 책, 느리게 쓰였기에 느리게 읽어야만 하는 책이 필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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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포)의 불완전한 짧은 시에서 우리는 에로스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배운다. 욕망이 손을 뻗는 것은 하나의 행위로 정의된다: (그 대상에 있어서) 아름답고, (그 시도에 있어서) 좌절된 것이며, (시간에 있어서) 영원한 행위로.
―앤 카슨, 황유원 옮김, 『에로스, 달콤씁쓸한』, 난다, 2025. 5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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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이고 고전문학 번역가인 앤 카슨의 『에로스, 달콤씁쓸한』은 쳇바퀴의 시간을 찢고 미학적으로 완벽한 막간을 열어준다. 카슨은 사랑만큼이나 시간에 깊은 관심을 두는데, 인용문과 같이 에로스는 한병철이 성과주체라 명명한 우리가 휩쓸린 생산성의 가속도, 후기근대의 시간과 완전히 어긋난 자리에서 발견된다. 『에로스, 달콤씁쓸한』은 다각도로 “timeless”하다. 텍스트 속에 의미를 새기는 모든 행위―쓰기, 읽기, 해석, 번역, 사유―속에서 시간이 멈추고 시간이 없어지고 시간을 초월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결정화된 아포리즘의 지혜는 무수한 디테일 앞에 멈춰서는, 느리고 집요하고 미시적인 읽기를 통해 수고롭게 건져진다. 이를테면 시에서 문법적으로 특이한 생략이 일어나는 지점을 세고 그 생략들 가운데 어떤 중요한 전치사(epi)에 영향을 미치는 횟수를 다시 추려내는 식이다. 특히 카슨은 epi라는 전치사가 연인처럼 “열렬”하다고 느끼며 “소리의 측면에서, 리듬 효과의 측면에서, 사고 과정의 측면에서, 서술적 내용의 측면에서” 에로스의 경험을 실연한다는 결론을 내린다.(57쪽) 표상에서 감각을 거쳐 비범한 앎에 도달하기까지, 카슨은 아마 오래도록 세상의 시계를 잊고 이천오백여 년 전의 시인이 쓴 글에 ‘붙들려’ 멈춰서 있었을 것이다. 카슨의 책에서 에로스적 지혜는 늘 경제적 시간의 요구를 묵살한다.
이것이 구술하지 않고 문자로 쓴 시의 힘, 읽기와 쓰기의 본성이다. 문자로 쓰인 시는 “과거의 메아리와 교차하는 현재 순간”(205쪽)이라는 이중의 시간을 환기한다. 두 개의 시간과 그사이의 이격을 환기하는 기술은 “시를 현실의 시간에서 잘라낸 순간”(205쪽)으로 만든다. 시간은 “흘러가는 개울이고, 이어지는 오솔길”이지만 읽기와 쓰기는 시간을 저지하고 조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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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이라는 단어는 녹는 얼음 조각처럼 매섭게 페이지에서 우리를 되쏘아본다......시간적으로 그 단어는 우리와 도착적인 관계, 즉 그 자체로 영원한 동시에 순간적인 관계를 고수한다......그것은 독자 혹은 작가에게 시간을 통제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맛보게 해준다.
―『에로스, 달콤씁쓸한』, 20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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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시인들이 이토록 에로스에 매혹당한 것은, 에로스가 바로 읽기와 쓰기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카슨의 해석/번역/글쓰기는 시간을 멈추고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성을 사유하지만 결코 탈역사적이지 않다.
이 읽기는 번역 행위를 꼭 닮았다. 문학의 번역은 비현실적으로 느린 읽기의 의무에 자기 자신을 묶는 행위다. 비효율성과 비경제성이 이 행위의 에로스를 이룬다. 앤 카슨이 인용한 릴케의 시구처럼 “공간은 우리에게서 뻗어나가 세상을 번역한다.”(124쪽) 황유원의 번역은 또 한 겹의 멈춰진 시간, 또 한 겹의 치열한 읽기와 쓰기를 덧씌우고 포개어 현기증 나도록 유혹적인 책을 완성했다. 그의 번역은 원문과 다른 지점에 멈춰서서 유심히 낱말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원문의 의미를 향해 정확하고도 유려하게 움직인다. 나는 ‘탈구dislocation’1)라는 역어 앞에서 자주 멈췄는데, 이 역어가 쓰일 때마다 앤 카슨이 주시하는 욕망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차이, 원어와 역어의 차이, 그 밖에도 무수한 사이와 차이가 환히 빛나며 나의 시간을 탈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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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개념, 주체, 기호가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어긋남으로써 의미와 정체성을 흔들고 재구성하는 것을 뜻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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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인 광인 : 거주하는 삶, 맹점이 되다
『에로스, 달콤씁쓸한』에서 시인인 연인이 욕망하고 손을 뻗는 대상인 에로스는 볼 수 없다. 연인(독자이자 작가인 우리)은 표상과 은유, 상상을 동원해 그 맹점을 향해 움직일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숨을 멈추거나 슬픔이나 사색에 잠겨 시간이 탈구된 그 자리에서, 사랑이 만져질 듯 만져지지 않는다. 우리는 에로스와 맞닿은 언어의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느끼며 맹점의 언저리를 더듬는다.
조르조 아감벤의 『횔덜린의 광기』(박문정 옮김, 현대문학, 2025)는 이 맹점의 자리를 영구한 삶의 주소로 삼은 미친 시인을 그린다. 사랑과 광기가 시를 부르는 욕망의 헛것이라면, 헛것에 이름을 주고 지상의 거주지를 짓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면, 그리고 시간이 탈구된 그 주소에 이따금 방문하는 게 독자의 일이라면, 미친 낭만주의 시인 횔덜린은 아예 그 주소로 이주해 평생 동안 매시 매분 매초 거주했다. 횔덜린의 삶은 수치상으로도 정확히 반분된다. 1770년에서 1806년까지의 36년, 목수 치머의 집에서 미치광이처럼 보낸 1843년까지가 36년이다. 첫 번째 인생에서 “평범한 삶에서 동떨어지는 걸 두려워하며” “세상 속에서 시대와 사건에 최선을 다해 참여”했다면, 인생 후반기에 그는 “자기와 세계를 단절하는 벽이 있는 것처럼” 세상 밖으로 자신을 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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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은 횔덜린이 이때 시간과의 관계를 자발적으로 재설정했음을 주지한다. 프랑스혁명의 정치적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박해받을 위기를 맞고 “스스로 자기 삶의 행적과 몸짓 하나하나에서 모든 역사적 요소를 제거하기로 결정”한 후로, 그는 완강하게 “에스 게쉬트 미어 니히츠Es geschieht mir nichts”라는 말을 반복했다.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라는 뜻이다.(15쪽) 한 인간의 삶 자체가 시간성에서 해방된 에로스의 맹점으로 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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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실은 오히려 전기傳記에서 담론적으로 표현 가능한 수많은 사건과 사실이 수렴하는 무한한 소실점처럼 나타난다. ... 우리의 시선은 그것들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존재 속에 오직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응시해야 한다.
―조르조 아감벤, 박문정 옮김, 『횔덜린의 광기』, 현대문학, 2025. 1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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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의 광기는 “형상 안에서의 삶”의 구현이며, 이 삶은 “순수하게 인식 가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로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18쪽)
에로스를 포착하기 위해 서정시의 형식이 동원되었다면 혁명의 시대 속에 멈춰선 광기를 포착하기 위해 연대기의 형식이 동원되어야 한다. 아감벤은 삶의 진실, 시간성, 글쓰기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삶을 앎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그의 삶을 훼손되지 않은 인식 가능성 자체로 지켜내”기 위해서다.(18쪽) 횔덜린의 시간은 멈추었으나 역사가 멈추지는 않았다. 후반 36년간 횔덜린은 세상의 시간을 통과하면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변하지 않는 횔덜린을 무수한 사람들이 보고 읽고 관찰하고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러나 횔덜린의 광기는 아무 진실도 알려주지 않고 다만 그들 자신을 비춘다.
역사의 연대기가 광기의 연대기와 병치될 때 형성되는 삐끗함, 그 틈이 의미의 주소다. 괴테의 세속적 시간과 횔덜린의 미친 시간이 좌우의 페이지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편집(83-135쪽)이 이 탈구를 형상화한다. 문학의 번역은 이번에도 그 탈구를 체화한다. 횔덜린은 고대 그리스 문학의 번역을 통해 조국과 나, 그리고 시의 이격을 담으려 했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 노력이 “광기와 혼란”(41쪽)으로 비춰질 뿐이다. 아감벤은 횔덜린의 번역을 “시인에게나 각 민족에게나 가장 어려운 과제인 자신의 고유한 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특권이 있는 시적 공간”으로 정의했다. 불가능하게 소외된 번역의 이 자리는 철학의 자리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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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휴지(休止) : 문학과 철학과 번역의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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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일부 사람들이 더는 자신을 조국의 일원으로 느끼지 못하게 되는 순간 탄생한다. 그러니까 시인들이 기대했던 조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낯설고 적대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인식하는 순간 탄생하는 것이다. 철학은 무엇보다 한 개인이 개인들 사이에서 느끼는 소외다. 즉 철학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거주하면서 여전히 이방인인 채로, 여전히 부재하는 조국에게 집요하게 말을 거는 존재방식이다.
―『횔덜린의 광기』, 4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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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정확히 소크라테스의 존재 방식이었다. 『에로스, 달콤씁쓸한』과 『횔덜린의 광기』의 사랑과 광기는 이렇게 “제정신을 잃은” 시와 철학과 번역의 일로 합쳐진다. 소크라테스는 광기를 재평가하며 “우리가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신들과의 거래를 중단하는 대가로 얻은 결과”라고 주장했다. “참으로 훌륭하고 실로 신성한 것들은 우리 바깥에서 살아 있고 활동 상태에 있으며, 변화를 일으키려면 안으로 들여져야” 하고 “정신을 잃지 않으면 어떤 예언자나 시인도 자기 기술을 실천할 수” 없다고.(『에로스, 달콤씁쓸한』, 258-259쪽)
이 아름다운 책들은 광인과 연인과 시인의 시간, 정치와 경제의 논리가 닿을 수 없는 텍스트의 휴지에서 일어나는 빛나는 사건을 포착한다. 황홀한 책의 틈새에 덜컥 붙들렸다면 그 자리에 머물러 가만히 기다려라. 시간이 ‘탈구’되면 그때 글이 움직이리라. 글이 무언가를, 반드시 움직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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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선형
읽고 쓰고 옮기고 그리는 사람.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존 밀턴을 공부해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영어권의 문학을 강의하고 번역한다. 옮긴 책으로 토니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 등이 있고, 지금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전작을 새로 번역하면서 작가와 작품과 번역에 관한 단상을 전하는 주간 뉴스레터 <제인 오스틴의 편지함>(https://maily.so/austenletters)을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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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아감벤 #앤카슨 #시와철학과번역 #기술의속도에저항하는읽기 #시간이탈구되는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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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사 ‘곳간’의 출발에는 작은 모임 <문학의 곳간>이 있다. 이곳은 “문학을 매개로 또 다른 문학을 발견하고 또 발명하는 모임”이다. 매달 한 번씩 자리를 펴온 이 모임이 곧 ‘117번째’를 맞이한다고 하니, 지구력(혹은 끈질김)을 짐작케 한다. 이 모임을 꾸린 사람은 김대성 문학평론가로 함께 읽을 책을 선정하고 글을 나누고 안부를 공유하는 등 세심하게 모임을 꾸리고 있다. 이 기반 위에서 출판사 곳간이 만들어졌고, ‘부산’의 산복도로를 소재로 한 소설집(박솔뫼 외, 『안으며 업힌』, 곳간, 2022)을 출간하면서 출판계에 들어섰다. 수익구조가 나지 않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지역’과 ‘환경’, ‘소수자’의 목소리들을 활자화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는 중이다. 작고 낮게 들리는 저 목소리들이 조금이라도 더 접촉면을 가지면 좋겠다는 판단에서, 올해 초 독립출판사 곳간에서 출간된 김비의 에세이집 『혼란 기쁨』을 책과참치 구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혼란 기쁨』은 소설가 김비가 수십 년 동안 몸을 횡단하며 느끼고 생각한 것을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그동안 퀴어 시민권에 대해 이야기 해온 작가가 묵혀두었던 몸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여기엔 비명과 환호가 교차한다.
❝나는 언젠가 ‘우리’라는 이름의 생존으로 기록될 것이다.❞
『혼란 기쁨』은 한국 사회에서 ‘몸’이 어떻게 규율되고 또 억압되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한 증언록으로도 읽을 수 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몸으로, 바로 그렇기에 혼란과 기쁨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몸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 퀴어 존재론이자 퀴어 아카이브가 턱없이 부족한 한국 사회에 뜻 깊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구글 폼 작성하면 독립출판사 곳간에서 다섯명에게 책을 증정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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