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의 철학자, 패트릭 드닌의 "체제 전환"
from. 차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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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드닌, 밴스의 사상적 근거
2023년 5월의 어느 오후, 『체제 전환: 탈자유주의적 미래를 향하여』1) 출판기념회 시작 직전에 모습을 드러낸 J.D. 밴스(Vance) 당시 오하이오주 연방상원의원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당일 행사의 주인공인 책의 저자에게 곧바로 돌진하듯 다가가 격하게 포옹해 눈길을 끌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노터데임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패트릭 J. 드닌(Patrick J. Deneen)이다. 그의 지적 작업은 오늘날 MAGA로 대표되는 미국의 신우파 세력들의 정치사상적 로드맵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미 『체제 전환』의 뒷표지에 실린 추천사를 통해 “현재 우리의 지배 계급이 아름다움, 전통, 그리고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사회적 제도들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방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파괴된 것들을 재건할 수 있는 포퓰리즘 정치의 비전을 명확히 제시해준다”라고 상찬한 바 있는 밴스는 저자 강연 후 있은 토론회에서 “탈자유주의 우파”임을 자처하면서, 의회 내에서 자신의 역할은 “명백히 반체제적”인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본인이 드닌의 사상적 추종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셈이었다. 이에 화답하듯 드닌은 2024년 7월 밴스가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트럼프식 포퓰리즘을 더욱 진전시킬 “이상적 후보자”라고 찬사를 보냈으며, 최근에도 밴스가 트럼프를 계승해 탈자유주의 엘리트들을 이끌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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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trick J. Deneen. 2023. Regime Change: Toward a Postliberal Future. London: For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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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닌의 지적 여정
드닌은 당대의 대표적 공동체주의자인 윌슨 캐리 맥윌리엄스(Wilson Carey McWilliams)의 지도로 지적 여정을 시작한다. 특히 드닌은 미국 정치사상사에서 주변화된 비자유주의 전통에 흥미를 가진다. 미국 정치학계에서 자유주의가 절대적 영향력을 독점하는 가운데, 연대·관습·공동체와 같은 가치를 강조하는 소수적 조류를 재발견하고, 이러한 전통이 현대 미국이 직면한 위급한 문제 해결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청년 시절 드닌의 철학은 전후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좌파적인 색채를 띠었으며, 그 후에도 드닌의 사유에는 반자본주의적 색깔이 지속적으로 묻어났다. 그런데 이후 프린스턴대를 거쳐 조지타운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 드닌은 가톨릭 신앙에 귀의하는 동시에 점차 우경화된 모습을 보였으며, 2008년에 발생한 전지구적 금융위기를 자유주의 문명의 한계를 증명한 결정적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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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2018년, 드닌은 그간의 자유주의 비판작업을 집대성한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2)를 출간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당시 논란의 중심이었던 트럼프 현상의 출현을 근대 서구 자유주의 프로젝트의 궤적이라는 거시적 분석틀로 설명함으로써 리버럴 진영으로부터도 호의적 평가를 받았다. 근대 자유주의의 무절제한 개인주의 방종 혹은 사적 이익 추구가 낳은 불평등 증대와 정부와 기업으로의 권력집중, 사회의 파편화와 전통규범의 상실, 자연환경의 파괴 등을 비판하면서, 당대 미국인들이 느끼고 있는 소외와 분노는 자유주의의 실패가 아닌 성공 때문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특히 기존 좌파와 우파, 민주당과 공화당의 세계관이 모두 자유주의적 합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성 정치 세력들은 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당성 위기에 대한 책임을 공유해야 하며, 자유주의 철학 외부에서만 문명적 해법이 찾아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비자유주의적 대안이란 바로 고대적 의미의 덕성(virtue)을 함양하고 공동선(common good)을 지향하는 시민 공동체 전통—19세기 초,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방문했을 때 미국에서 발견하고 찬양했던 타운 민주주의 혹은 공화주의—의 복원을 의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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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Patrick J.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8(패트릭 J. 드닌, 이재만 옮김,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민들레,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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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지점까지 드닌의 논지는 미국 학계에서의 고전적 테마인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 논쟁의 맥락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의 통렬한 자유주의 비판과 토크빌적 대안 제시는 근대 계몽주의의 무연고적(unencumbered), 나르시시즘적 자아관과 소극적 자유관에 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고대 폴리스의 공동선 추구와 시민적 덕성, 그리고 적극적 자유(=자치) 개념을 현대에 복원하려 했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와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등 공동체주의 사조의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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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 보수주의를 통한 체제전환
그러나 이후 드닌의 자유주의 비판은 훨씬 더 급진화되어 탈자유주의적 체제 전환을 추진하는 극우 이념의 형태로까지 전개되었다. 즉, 기성 자유민주주의 시스템 아래 보수와 진보 모두가 합의하고 있는 리버럴 컨센서스를 초월하기 위해, 혁명적 변화를 추동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최근 저서, 『체제 전환』의 핵심 문제의식이다. 사실 2018년 저술의 결론에서만 해도 드닌은 지역의 작은 공동체들의 잠재성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부활과 지방 자치의 확산이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대안—“자유주의 이후의 자유”—을 제공할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그 후 전세계적인 포퓰리즘 운동의 부상을 역사의 긍정적 돌파구로 인식하게 되면서 드닌은 자신의 제안이 지나치게 온건했다고 반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2023년 저작에서는 신우익 세력이 중앙집권적 국가기구를 장악해 급진적으로 “공동선 보수주의(common-good conservatism)”의 비전을 관철하는 “체제 전환”을 새로운 목표로 삼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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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닌에 따르면 자신의 정치이념을 집약해 표현한 “공동선 보수주의”란 자유주의의 진보 이념에 내재한 위험성을 경고했던 근대 초 보수주의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사상으로, 경제적 평등과 함께 가족·공동체·교회·민족과 같은 근원적인 형태의 연대를 증진시키고자 한다(p. xiv). 드닌은 이 새롭고도 오래된 사상을 되살려서 기성 우파운동을 주도해 온 “자유주의적 보수주의(liberal conservatism)”를 대체하려 한다. 이는 철학적으로 가톨릭 사회 교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반다원주의적 스탠스를 취해 강력한 중앙 정부가 사회보수적인 도덕관을 지지하고 법으로 이를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자유시장 근본주의를 거부하며, 성과 인종 등 사회문화적 문제에 있어서는 반동성애, 반낙태와 같이 명확히 반동적인 입장을 취한다(pp. 65-147).
그리고 이 공동선 보수주의를 실현해 나갈 “체제 전환”이란 좌우를 막론하고 부패해 버린 자유주의 지배계급을 축출하고 탈자유주의 신질서를 건설하려는 프로젝트로, 기성 헌정주의 제도의 프레임은 유지하되 근본적으로 상이한 비자유주의적 에토스를 그 속에 주입하는 과정을 의미한다(p. xiv). 그리고 이 정치적 변동을 추동하기 위해서는, 마키아벨리가 고대 로마에서 발견했던 혼합정체와 평민들의 전술을 차용하여, 탈자유주의 철학으로 무장한 새로운 보수 엘리트와 포퓰리스트적 대중 간의 계급동맹—이른바 “귀족포퓰리즘(aristopopulism)”—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pp. 151-185). 이러한 사상적 전회과정에서 드닌은 2019년 “비자유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 총리의 초청으로 헝가리를 방문하여, 그와 함께 탈자유주의 질서의 미래에 대해 논하는 등 해외의 권위주의 세력과 연대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특히 그는 오르반 치하의 헝가리가 “국가와 정치질서가 보수적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증진할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하는, 현대 자유주의에 맞서는 저항의 한 모델을 제공해준다”고 칭송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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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자유주의 사조, MAGA운동, 세계적 전환
MAGA 운동을 위시한 현대 신우파의 부상은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개념을 빌자면 “이중 운동”의 한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4) 지난 반세기에 가까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파고 속에 관철되었던 “탈내장화” 압력 때문에 물질적, 존재적 불안에 시달려온 사람들이 반격을 개시하면서, 2010년대 중반 이후 포퓰리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드닌과 밴스 등이 대변하는 신우파 세력이 원리주의적 반동의 노선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20세기 중반 폴라니가 관찰했던 재앙, 즉 “자유방임원칙”에 대한 “사회적 보호원리”의 백래시가 파시즘의 길로 귀결되었던 것과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다. 사실 『체제 전환』이 출간되었을 때, 여러 비평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비판했던 포인트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드닌의 자유주의 비판의 창의성과 탁월성은 인정하나, 그 대안의 노스텔지어적 특성 즉, 과거의 낭만화가 지닌 위험성이 공통적으로 지적되었다. 그 이상화된 “전통” 사회가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억압적 체제였음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재했기에, 기독교 민족주의, 보수적인 가족정책, 출산율 제고 정책 등을 이유로 오르반 철권통치하의 헝가리를 매력적인 모델로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체제 전환”이 권위주의적 공동체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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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칼 폴라니, 홍기빈 역,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도서출판 길,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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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표현하면, 신우파의 부상은 개인 대 집단, 혹은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라는 미국정치사상사의 오랜 논쟁구도 속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오늘날의 탈자유주의 담론은 분명 20세기 후반 사상계를 풍미한 공동체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미국의 자유주의 헤게모니 담론을 비판하고 있다. 가령,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의 파편화에 대한 우려와 그 대안으로서 “공동선”에 기초한 공공철학의 복원은 대표적 공동체주의 이론가인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이 천착해 온 주제이기도 하다. 세계화와 금융화,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능력주의(meritocracy)가 저학력 백인노동계급의 좌절감 또는 포퓰리즘적 분노를 증폭시켜 왔고, 그 논리적 귀결이 트럼프의 2016년 당선이었음을 샌델은 지적하였다.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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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이클 샌델, 이경식 역,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와이즈베리,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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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과거 자유 대 공동체의 대당은 어쨌든 근대 자유주의라는 커다란 패러다임 내부의 논쟁이었다. 그러나 신우파는 자유민주주의 교리의 가장 기본을 이루는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라는 원칙을 부정하고, 배타적인 종족종교적 민족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패러다임 그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윌슨 캐리 맥윌리엄스의 딸이자 자신 스스로 공동체주의를 계승하고 있는 수잔 맥윌리엄스 반트(Susan McWilliams Barndt) 포모나대학 정치이론 교수는 드닌이 부친의 정치사상을 왜곡했음을 비판한다. 본래적인 의미의 공동체주의가 연대와 박애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에 반해, 드닌의 저작은 독재를 수용하고 오래된 편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두운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성애자 같은 소수자들을 적대시하고 증오를 전파하는 점은 사랑과 우정을 통해 민주정치를 실현하려는 공동체주의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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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사회에서 탈자유주의적 방향성은 하나의 시대적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거의 모든 차원에서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최첨단을 상징해 온 미국의 주류 정치공간에 반근대, 반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전통주의 또는 원리주의 세력이 부상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다. 루이스 하츠(Louis Hartz)의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미국은 늘 로크적 자유주의가 전일적으로 지배해 온 상상의 공동체였다.7) 그런 면에서 탈자유주의적 사조의 도전은 미국의 근원적 정체성 자체를 뒤바꿀 수 있는 미국사의 유례없는 국면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미국내 사회세력간 경합의 결과는 미국뿐만 아니라 기성 세계질서 전체에 커다란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란 점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건 세계사적 계기를 경유하고 있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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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루이스 하츠, 백창재·정하용 역,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 독립혁명 이후 미국 정치사상의 해석』, 나남,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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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차태서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오늘날의 미국과 세계질서변동 연구에 집중해 왔다. 저서로 『30년의 위기: 탈단극 시대 미국과 세계질서』가 있다. 앞으로 성찰적 현실주의를 토대로 다극화 시대 국제관계 변화와 한국 외교의 대응방향에 대해 모색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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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파 #MAGA #체제전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J.D. 밴스 #패트릭 드닌 #도널드 트럼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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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명령 앞에서
:느린 과학으로 가는 길
from. 박동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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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편집자의 좌절된 꿈
“교수가 되려면 논문을 써야 하고 책을 쓸 시간은 없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은 초년생 출판 편집자가 청년 연구자에게 책 쓰기를 권할 때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정중히 거절하는 말이지만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이기도 하다.
출판계가 어렵다고 해도 매년 이 업계에 진입하는 젊은 편집자들이 있다. 그중에는 같은 세대의 청년 연구자와 함께 시대의 통념에 도전할 연구를 책으로 펴내려는 꿈을 품은 사람도 있다. 지금 이곳에 절실히 필요한 고민을 날카롭게 담아내어 새로운 담론 지형을 개척하는 꿈이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편집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 봤을 생각이 아닐까.
그러나 초년생 편집자가 역량을 갖춘 청년 연구자를 어렵사리 찾아내어 책을 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하면 곧장 시간이 없다는 말을 정면에서 듣게 된다. 순진했던 청년 편집자는 이제야 연구자가 처한 현실을 깨닫는다. 교수가 되기 위해 실적을 쌓아야 한다는 압박이 연구자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혹시 교수가 되고 나면 괜찮지 않을까? 그때는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초임 교수는 행정 업무로 너무 바빠서 책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대신 논문을 묶어서 내면 안 될까요? 업적 평가 때문에 필요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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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지어다
다소 과장된 극적인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위의 일화는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엄연한 현실이다. 16년째 출판계에 몸담고 있는 나 자신의 이야기이자 동료 편집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에피소드를 단지 몇몇 사람들의 개인적인 좌절로만 여길 수 있을까? 그 뒤에는 어떤 구조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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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자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에디토리얼, 2025)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적실한 언어를 제공해준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과학책이나 철학책이라기보다 ‘선언문’이다. 책의 구성도 체계적이지 않다. 2010년대 저자가 여러 학회에서 연설하거나 발표한 글의 모음이다. 그래서 현장감이 살아 있고 메시지가 명확하다. ‘빠른 과학’이 낳는 폐해를 세계적인 과학철학자의 목소리로 쉽게 들을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와 지식경제, 양적 평가 시스템으로 인해 학계가 왜곡되고 있다는 비판은 이미 흔해졌다. 학술 연구가 점점 더 시장 원리에 종속되고 있다는 우려 또한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스탱게르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철학자답게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짚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근대 과학을 특징짓는 평가와 구획의 모델 자체다. “좋은 논문이 숙성될 시간이 주어지고 심사위원들이 세심하고 유능하다고 해도, 이러한 평가의 모델 아래에서는 ‘과학을 수행하는’ 서로 다른 방식의 다양한 과학들이 평등하지 않으며, 평등했던 적도 결코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평등하지 않을 것이다.”(88쪽)
스탱게르스에 따르면, 근대 과학은 그 시작부터 언제나 전속력으로 전진해온 ‘빠른 과학’이었다. 빠른 과학은 오직 전문 동료만을 대상으로 하는 누적적 지식 생산을 특징으로 한다. “우리는 알지만 너희는 믿을 뿐이다”라는 근대주의적 태도로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 과학을 추구하는 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진 것을 구획하며 지적 권위를 확보해왔다. 여기서 합리성과 객관성은 다른 사고 집단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도구가 되었고, 세계의 복잡한 난맥상에 대해 무관심하도록 과학자들을 육성하는 방식을 정당화했다.
스탱게르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빠른 과학의 모토를 이렇게 요약한다. “과학의 용어로 환원될 수 없는 한가한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그런 질문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너의 유일한 책무인 지식의 발전을 배반하는 것이다!”(160쪽) 연구자들이 편집자의 제안을 거절하며 말하는 ‘책 쓸 시간이 없다’는 변명 또한 이 모토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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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과학의 발명
스탱게르스는 빠른 과학의 기원을 근대 과학의 형성기에서 찾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세기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다. 그는 조향사, 금속공, 약제사에 이르는 다양한 기예와 기법을 익혀야 했던 화학적 수련 과정을 4년짜리 박사학위 과정으로 단순화했다. 수백 명의 학생을 단기간에 훈련시키는 모델이 만들어졌고, 그는 ‘화학자 양성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모델은 곧 화학 산업과 결합하여 ‘빠른 화학’을 발명했다. 학문적 연구와 산업적 요구가 체계적으로 결합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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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의 불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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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학문적 지식의 빠르고 누적적인 발전을 일반적인 수준 이상으로 장려하고, 이러한 발전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모든 질문을 무시하는 태도”(155쪽)가 생겨났다. 19세기에 형성된 학문적 과학의 이념은 과학의 일과 사회의 일을 분리하고, 과학을 사회적 책임에서 면제하는 체제로 정착했다. 과학과 산업의 진보로 인해 발생되는 모든 외부 효과는 어디까지나 ‘사회’의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구조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구체적인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GMO를 옹호하는 생물학자들은 세계적 기아의 사회적, 경제적 원인을 무시한 채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GMO 식물의 재배 과정에서는 살충제 내성 곤충, 생물다양성 감소, 비료 남용 같은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실험실 수준에서는 알 수도 없고 제기될 수도 없는 문제들이다. 현장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단지 과학의 외부에 속하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이는 자연과학의 문제만도 아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스탱게르스의 책은 결국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을 포함한 모든 근대 학문에 관한 이야기다.
최근 가야트리 스피박 초청 강연에서 한국어 통역이 제공되지 않았을 때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이런 비판을 학계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의 사소한 오해로 치부했다. 이런 취급에 반발하며 반대편에서는 그런 ‘이류 학자’를 초청하는 것이 식민지적 습속이라는 말까지 던졌다. 논란은 금세 상호 경멸로 치달았다. 자기 분야 외부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학문의 장애물이나 오해로, 혹은 시간 낭비로만 여겨진 것이다. 이는 인문사회과학에서 말하는 “비판적 성찰성”이라는 것도 학문 분과적인 동원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빠른 과학의 입장을 반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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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과학 선언
문제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빠른 과학이 언제나 사태의 ‘유일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한다는 데 있다. 특정한 혁신이나 새로운 이론이 과학적 사실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때 학계 외부와의 복잡한 논의와 협의 과정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연구에서는 가능한 한 빨리 결과를 산출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주저함, 협의, 우회와 지체 등은 ‘비생산적’이라는 이유로 배제되기에 이른다. 그 결과, 학문은 타자와 진지하게 관계를 맺기보다는 경쟁과 성과 축적의 논리에 갇히게 된다.
해법은 무엇일까? 스탱게르스는 느린 과학을, 곧 학문의 속도 늦추기를 주문한다. 그러나 여기서 느림은 단순한 완급 조절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학문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타자들에게서 다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타자들과 포획의 관계가 아닌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130쪽) 학문 외부의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학문의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 “덕분에” 더 나은 학문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이렇듯 느린 과학은 전속력 전진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고 정화되어야 했던 모든 것과의 관계 맺음에 관심을 기울이려는 시도다. 이는 학문의 ‘자율성’이라는 근대주의적 덕목이 일종의 독이 든 선물이었음을 직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스탱게르스는 기후위기에 직면한 인류 사회만이 아니라 학계도 병들었고 치유가 필요하다고 일갈한다. 이 점에서 학자들은 결코 순진하지 않았다. 정치적 삶의 끔찍한 혼란스러움과 단절하여 상아탑에서 자율성을 누리는 과거의 황금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 지저분한 현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서로의 지성에 대한 감식안(taste for intelligence)이다. 과학자와 시민은 함께 지적인 관계를 맺으며, 어떤 학문적 질문이 현실에서 의미 있고 타당한지를 판별하는 공동의 안목을 길러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일반교양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의 공적인 지성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그 어떤 학문도 혼자서 옳을 수는 없다. 학자들과 대중들 사이의 새로운 동맹 맺기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편집자와 출판의 일도 중요해진다. 스포츠나 음악에서 건강한 문화가 형성되려면 선수와 연주자뿐 아니라 감식가(connoisseur)의 존재가 필수적이듯, 학문도 마찬가지다.(21쪽) 지식을 함께 평가하고, 선전과 위험을 구분하며, 종종 무시되거나 생략된 쟁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감식가 없이는 학문도 공적인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스탱게르스가 말하는 느린 과학은 바로 이런 감식가들의 대중지성을 학문 제도 외부가 아니라 학문 제도 내부의 필수 조건으로 포함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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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영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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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다른 과학이 가능하다면!
하지만 이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전쟁과 기후위기가 눈앞에 닥친 시대에 이런 학문적 논의는 한가한 일이 아닐까? 당장 해결책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제 와서 느림을 말하는 것은 사치가 아닐까? 그러나 스탱게르스는 정반대로 말한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다른 과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라는 제목은 대안세계화 운동의 구호, 즉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점에서 느린 과학 선언은 다른 모든 슬로우 운동들, 탈성장 운동들과 궤를 같이한다. 지금의 빠른 과학의 속도는 모든 집단지성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지식의 인클로저(enclosure)와 마찬가지다. 학문의 파괴와 문명의 파괴가 연결되어 있다는 지표는 곳곳에 있다. 어째서 학계에서 인공지능이 그토록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자문해보자.
이 책은 대체 무엇이 진짜 시간 낭비인가를 다시 묻기를 요청한다. 논문을 쓰는 건 필수적인 시간이고, 책을 쓰는 건 시간 낭비임을 강요하는 학계의 평가 시스템은 병들어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근대적이고 더 합리적인 학문과 과학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바로 옆 사람들과는 소통도 되지 않는 방식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과학자들과 연구자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동료들, 그리고 시민들과 함께 배우는 과정 속에 있는가?
스탱게르스는 연구자들을 존중하는 사회가 필요할 뿐 아니라 연구자들이 동료와 사회를 경멸하지 않도록 강제하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져 온 타자들의 침묵을 정당할 수 있는 어떤 단일한 입장도 없는 사회를 위한 투쟁이다.”(79쪽) 결국 이 책은 연구자뿐 아니라 출판 편집자와 독자에게도 느린 과학의 동맹자가 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학문이란, 연구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근본부터 다시 묻게 만드는 책이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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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동수
철학책 편집자. 사월의책에서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과학기술학과 현대사상의 새로운 조류에 관심이 많으며, 동료 편집자들과 함께 ‘편집자를 위한 철학 독서회’를 수년간 진행 중이다. 저서로 『철학책 독서 모임』이 있다. 현재 두 번째 책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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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을 위기로 묘사하면서 공포 마켓팅을 수시로 발산하는 갖은 담론들도 횡행한다. 위기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이 담론들이 대체로 지역의 종 다양성을 획일화하려 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전개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문학들>이 20년 동안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은 작고 웅성거리는 말을 내팽개치지 않고 형상화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와 소설, 비평, 에세이, 서평, 5․18, 장소와 공간 등에서 그런 말들을 감싸안았을 터이다. 말이 없던 곳에 시민권을 함께 할당하려는 열정이야말로, 20년 역사 가운데 가장 빛나는 대목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더군다나 그런 시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이루 말할 수 없는 지역의 문학적 열정, 노력과 구체적인 이바지가 기입되어 있을 것이다. <문학들>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함께 지지하고 응원해 주시기를.
*계간 <문학들>에선 구글폼 작성자 가운데 10명을 선정해 1년 정기구독권을 증정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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