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더이상 구경꾼이 아니라 ‘이미 배에 올라타 있으며’, 우리를 둘러싼 재앙을 피할 수도 또 멀찍이 떨어져 안전한 관측소에서 지켜볼 수도 없다. (···) 우리는 난파한 당사자다. 우리는 익사를 피하고, 침몰한 배를 다시 조립해야 한다. 다시 말해 패배를 피할 수 없거나 또는 외부로부터 묘사하거나 분석할 수 없다. 좌파적 우울이 난파 이후 남은 것이다.
_엔조 트라베르소, 『‘좌파’의 ‘우울’』, 김주은 외 옮김, 새물결, 2024, 8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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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는 왜 우울한가
지난겨울 자신의 감정을 꽤 솔직히 말할 줄 아는 한 활동가가 광장 집회를 다녀온 후 “우울하다”고 말했다. 주마등처럼, 많은 투쟁을 통과해온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말 한마디에 익숙한 회귀를 마주하는 듯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광장 우울증’이라고 했다. 장기간의 대규모 투쟁이 끝나고, 기대했던 정치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느낄 때 찾아오는 상실감이나 허무를 일컬어 그렇게 지칭한다고 했다.
‘좌파’에 대해 저마다 떠올리는 이미지나 전형은 제각각이다. 혹자는 ‘일종의 문제 제기 집단’을 ‘좌파’라 여길 것이고, 누군가는 어느 유명 만화의 대사처럼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한 발을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1)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 매스미디어는 ‘좌파’란 말로부터 우리 시대의 엘리트 기득권 분파 중 하나인 민주당과 그 열성 지지자들을 의심 없이 연결 짓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스스로를 좌파 활동가라 여기는 나는 모종의 모멸감과 수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감정이 ‘좌파’의 모호해진 정체성을 구원해주진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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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규석, 『송곳』, 창비, 20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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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누군가는 우리가 구태여 ‘좌파’의 의미를 구원해내야 하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좌파’라는 명칭 대신, ‘민주적 사회주의자’나 ‘진보주의자’ 같은 조금은 더 명확한 개념을 활용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운동에 역동성과 이니셔티브를 부여할 수 있다면 뭐라고 부르던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절충으로는 ‘좌파 활동가’의 방황과 우울을 설명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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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는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이며, 그리고 역사적 행위 속에서 무엇을 해야만 하게 되는가가 중요하다”(2)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집단의 성격은 자신들을 스스로 뭐라고 이름 짓느냐가 아니라, 그 사회가 처한 역사와 정세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한 농민들이나 1996~97년 민주노총 총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좌파’라고 여겼을까? 해당 정세에서 발휘한 그들의 역량이 그들을 ‘좌파’로 위치 짓게 한 것이라 봐야 타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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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 20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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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은 좌파의 위기가 단순히 대처와 레이건을 위시한 신자유주의 반동이 부상했거나 좌파가 내부로부터 분열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읽고 그에 맞는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좌파 자신의 실패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3) 그런 점에서 오늘날 좌파는 실로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폭풍우가 휩쓸고 간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에 맞선 대항 혹은 대안 주체의 형성은 매우 미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능력주의나 자기경영, 경쟁의 논리를 내면화한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을 경험하고 있다. 불평등이나 차별과 같은 구조적 모순을 ‘각자의 탓’으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각자의 정체성과 욕망마저 재구성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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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웬디 브라운, 「좌파 멜랑콜리에 저항하기」, 강길모 옮김, 『문화/과학 101』, 2020년 봄호(Wendy Brown, “Resisting Left Melancholy,” boundary 2 26, no. 3 (1999):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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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도 예외는 아니다. 모순이 극대화되고 있음에도 이에 맞서 세상을 바꿀 집단적 역량이 낮은 시기를 통과하는 활동가들에게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상처들이 있다. 탄탄한 관계 맺음과 자기 돌봄으로 그 상처를 잘 보듬고 다시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나의 무능 때문에’ ‘ 우리의 전술적 과오 때문에’ ‘조금 더 열과 성을 다해 싸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부족한 역량 때문에’ 싸움에서 패배했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과 좌절이 활동가들의 감정을 지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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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멜랑콜리
엔조 트라베르소Enzo Traverso의 『‘좌파’의 ‘우울’―21세기적 진보는 어떻게 가능한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좌파 문화에 내재했던 멜랑콜리Melancholia란 집단 정동을 분석한다. 그것은 흔히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와 유토피아를 향한 꿈의 종언이 좌파에게 안겨준 깊은 역사적 패배감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대다수의 이름 없는 좌파 활동가들에겐 그보다 훨씬 드라마틱했던 수만 가지의 패배와 좌절이 있었다. 현재의 좌파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시대에 갇혀 새로운 길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파리 코뮌, 스파르타쿠스 봉기 등은 피비린내 나는 진압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저항하는 이들의 이념과 열망을 공고히 하고 자부심이 되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자신의 패배로부터 배우고 더욱 강력하고 광범위한 기반 위에서 항상 부활한다고 인식했는데, 이런 관점은 한때 사회주의 운동이 패배의 정치학을 진취적으로 견지했음을 반영한다. “아흔아홉 번 패배할지라도 단 한 번 승리”(4)하리라는 노랫말 역시 이런 패배의 정치학을 문화적으로 체화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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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동자문예창작단의 <가자! 노동해방> 속 가사다. 이 노래는 1981년 폴란드 영화 <철의 사나이Człowiek z żelaza>에 수록되면서 유명해진 폴란드 민중가요 <야넥 비시니예프스키가 쓰러졌다Janek Wiśniewski Padł>를 번안한 곡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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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베르소는 항상 ‘미래지향적’이었던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과 혁명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멜랑콜리적 성격을 띠게 되었는지 질문을 던진다. 좌파 멜랑콜리는 단순히 패배로 인한 슬픔이나 체념이 아니라, 강력한 상실 이후 감정의 찌꺼기로 남아 정치적·문화적 효과를 발휘하는 정동 구조다. 상실된 이상을 완전히 놓지는 않은 채로 지속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그러다보니 과거의 대상은 현재의 실천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이를 ‘패배자의 역사’를 재정치화하는 감정 구조로 보고, 벤야민·크라카우어·블로흐·루카치·아도르노 같은 지식인들의 궤적을 추적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지난날의 상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투쟁 동력을 찾아내고, 비판적이고 생산적인 감정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지 탐색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기억’의 문제는 더이상 “미래를 위한 전략적 기억”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기억”이 지배적 형태가 됐다. 혁명을 위한 투쟁의 기억은 주변화되거나 지워지고 있고, 과거의 기억들은 “폐허의 들판”으로 인식될 뿐이다. 트라베르소가 보기에 유토피아를 향한 꿈이 사라진 시대의 좌파 멜랑콜리는 상실된 이상으로부터 분리되거나 새로운 사랑의 대상으로 리비도를 전환하는 것을 방해한다.
멜랑콜리를 재해석하기 위해 트라베르소는 발터 벤야민과 보헤미아니즘, 탈식민주의 관점에 의해 갱신된 마르크스주의의 문제 설정을 소환한다. 벤야민은 선형적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과거를 ‘지금시간Jetztzeit’이란 개념을 통해 재활성화하고, 패배자들의 희망을 ‘구원’해야 한다고 역설했었다. 벤야민에게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순간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기억을 움켜쥐는 것”이며, 이는 현재를 변화시키는 실천이다. 요컨대 트라베르소는 과거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야만’이 필연적 미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상실된 유토피아에 대한 애도를 통해 미래를 향한 “멜랑콜리적 내기를 걸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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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어떻게 복기할 것인가
인간과학 역사가historian of Human Sciences 해나 프록터Hannah Proctor의 『Burnout: The Emotional Experience of Political Defeat(번아웃: 정치적 패배의 정서적 경험)』(Verso, 2024)는 저자 자신의 패배한 운동의 경험을 통해 ‘좌파 멜랑콜리’를 상기하고, 이것의 역사적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하면서 사회운동 경험 일반에 이 집단 정동을 위치시킨다. 그가 보기에 ‘좌파 멜랑콜리’에 관한 기존 이론들은 그러한 패배를 경험한 사람들이 실제 어떻게 패배를 경험하는지에 대해선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지적이며, 절망한 이들이 느낀 정서적 고통에 대해선 비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프록터는 트라베르소가 『‘좌파’의 ‘우울’』에서 공산주의를 “종결된 프로젝트”로 설명하거나, 역사가 “기억으로 대체되고 의미 있는 투쟁이 무미건조한 사색으로 대체됐다”고 서술한 것에 대해 패배 경험에 대한 실질적 감각이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브라운이나 트라베르소의 거시적 분석으로는 “엉망진창이고, 종종 고통스러우며, 개인과 관계에 의한 사건들”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좌파 운동의 메커니즘과 조직문화는 활동가들의 헌신이나 절제된 감정을 미덕으로 여기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조직문화에서는 활동가들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대면하거나 공유하기 어렵다. 자칫하면 자신의 우울이나 슬픔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기도 하고, 그래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냉소,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자신이 너무 나약하다거나 혹은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에 갇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등 오만가지 상념들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록터는 이런 부정적 감정들을 그저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이 아닌, 기나긴 투쟁의 일부로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즉, ‘감정의 정치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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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프록터는 우울이나 노스텔지어·번아웃·정신적 피로·응어리·트라우마·애도 같은 감정들을 개인의 심리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구조와 문화, 정세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적 정동이란 관점에서 응시한다. “패배는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무엇을 위해 싸울 가치가 있는지도 보여준다”며, 사회운동 과정에서 경험한 패배가 우리의 정동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고, 또 그 감정을 어떻게 사유·조직·전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살핀다. 가령 파리 코뮌 시기의 개인적 기록들을 탐사하면서 처절한 공포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싸우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리라 다짐하는 어느 혁명가의 편지 같은, 정의로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미래지향적 갈망들을 소환한다.
‘번아웃’을 다룬 이 책의 4장에서 프록터는 ‘자기 착취가 번아웃을 유발한다’는 번아웃에 관한 한병철식의 정의가 개인의 정신적 고통이 사회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1974년 허버트 J. 프로이덴베르거H. J. Freudenberger가 ‘번아웃’이란 말을 처음 쓰게 된 것은 무료 진료소 운동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들의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 자원봉사자들은 단순히 과로로 지친 게 아니라, 사회정의 실천에 대한 감정적인 헌신과 그 프로젝트의 어떤 결함에서 오는 실망감, ‘이상의 상실’로 인한 슬픔 때문에 번아웃을 경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번아웃에 대한 정의는 보통의 노동자들이 겪는 피로를 포함하게 됐는데, 절묘하게도 이는 무료 진료소 운동이 일종의 자선 활동 모델로 변질되는 것과 맥을 같이했다. 프록터는 집단적 실천만이 자본주의 체제하 번아웃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2020년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에서 나타난 공동체 돌봄과 상호부조를 주목한다.
‘애도’ 문제를 다루는 8장에서 저자는 미국의 사회운동가 조 힐Joe Hill의 유명한 슬로건 “애도하지 말고 조직하라!Don't mourn: organise!”를 언급하면서, 사회적인 불의가 지속되는 상황에선 애도마저 방해받을 수밖에 없음을 상기한다. 그러면서 “애도하는 전투성”이란 과정을 통해 애도가 정치적 실천과 불가분하게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죽음에 맞선 거리 시위는 조지 플로이드 개인의 죽음이 경찰에 의한 국가폭력과 연결되어 ‘애도’와 ‘조직화’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게 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전투적 애도’가 정의로운 미래를 요구함으로써, 억압적 현실을 타파할 수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이 경계는 너무 모호해서, 모든 죽음이 ‘애도-조직화’로 연결되진 않는다. 그러니 ‘애도하는 전투성’을 떠올리기 전에, “우리가 원하는 급진적 사회변혁이 오기 전까지, 억압받는 사람들이 물리적으로·정서적으로 버틸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실천”을 조직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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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힘
활동가들은 (모든 인간이 그렇듯) 때때로 ‘희망이 없다’고 느끼고, ‘회피’하려 하거나, ‘부정’ 혹은 ‘정신 승리’한다. 악몽을 꾸거나, 울분을 쏟아내고, 절망의 언어를 내뱉고, 심지어 이제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내뱉거나 목숨을 끊기도 한다. 트라베르소와 프록터가 강조했듯, 활동가들의 이런 우울과 번아웃은 “이겨내야 할 심리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조직적 과제다. 멈추지 않고 싸워야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는 계속해서 살아남는 방법을 조직하는 것에 있다. 『Burnout』의 저자 해나 프록터는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긴박함과 일상과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인내 사이의 긴장을 상기한다. 우리는 과거의 좌절로부터 한꺼번에 벗어날 수 없으며, 의식을 재조정하기 위해선 고통스럽고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즉, ‘다음 싸움까지 버티는 힘’을 조직해야 한다.
‘광장 우울증’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윤석열을 퇴진시켰음에도 어떤 활동가들은 왜 우울감을 토로했을까? 극우 세력의 사회적 토대가 극복되지 않았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그런 모순이 지속될 것만 같다는 예감, 나아가 차별과 불평등에 맞선 요구가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되는 지배 이데올로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명백히도 노동자 민중 정치세력화 프로젝트의 실패와 대중운동의 축소로 구조적인 패배가 누적되고 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불안정한 생계나 활동으로부터의 감정노동, 우리 안의 갈등으로 번아웃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 놓여 있다. 즉, 오늘의 우리를 결정지어온 역사적 기억을 비판적으로 재배치하지 않는 한, 활동가들의 번아웃과 우울을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어젠다로 삼지 않는 한, 그것을 다시 돌아볼 수도 없다.
우울이나 번아웃, 응어리, 트라우마만큼이나 대중의 정서와 동떨어진 생각을 강화하며 정서적인 붕괴로 치닫는 것 역시 일종의 병리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가령 어떤 투쟁은 패배 이후에 변화된 조건을 무시하는 경향을 동반하는데, 대중적 지지기반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운 투쟁일수록 그런 확률이 높다. 더구나 그 패배는 종종 기존 구성원들의 탈락과 분열로도 이어진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려면 프록터가 제시하는 “혁명 전까지의 버티는Survival Pending Revolution” 삶과 관계, 즉 ‘패배를 잊지 않는 법’과 ‘패배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동시에 배워야 한다. 이런 시대에 활동가의 역할은 단지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위기를 맞닥뜨린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고, 결집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이때, 활동가들이 어떤 멘탈을 견지하느냐의 문제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좌파’의 ‘우울’』과 『Burnout』은 ‘n개의 위기’ 정세를 살아가는 이 땅의 활동가들과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길 원하는 모든 이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Burnout』이 번역 출간되어 한국 사회운동에 관한 유의미한 토론 공간이 열리길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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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홍명교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해왔고, 동아시아 국제연대에 관심을 갖고 연대하고 있다. 현재 플랫폼c와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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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서평 선정작 ③
가부장제, 함께 때려야 한다
from. 김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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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페미니즘 책은 읽고 나면 일단 남자친구라도 때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벨 훅스의 『난 여자가 아닙니까?―성×인종×계급의 미국사』(동녘, 2023)를 읽고 나서는 누구를 때려야 할지 몰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 남성이 여성을 사랑한 적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남성이 여성을 사랑한다면 가부장제는 왜 번영해왔을까? 압제자와 피압제자 간의 사랑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과연 자유로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벨 훅스의 『난 여자가 아닙니까?』는 흑인 남성과 흑인 여성이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해 넘어야 할 가부장제의 기원과 실천의 역사를 서술한다. 흑인 남성이 흑인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대물림된 제국주의-가부장제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이 벽을 넘어서지 않아도 문제 없이 살아온 남성과 달리, 그 벽을 넘어서야만 하는 역사적 의무를 지고 태어난 이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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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적 제국주의에서 인종차별적 제국주의까지,
변하지 않은 이중적 착취의 대상
흑인 여성을 향한 이중적 착취는 흑인 여성이 흑인 노예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흑인 여성 노예의 성적 취약성은 굴복과 착취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흑인 여성 노예는 백인 노예 소유주와 더욱 가까이 생활했기에, 노예 소유주는 성적 착취 형태의 ‘제도화된 테러리즘’(Angela Davis, 1974)을 자행했다. 또한, 흑인 여성은 동일한 노동량을 감당해도 관리직이나 운전사 같은 직위로 승진하지 못했기에 비교적 높은 지위의 흑인 남성 노예에게도 성폭력의 대상이었다.
곧이어 백인 남성은 자신을 ‘성적으로 미개한’ 흑인 여성으로 인해 성적 타락에 빠져버린 피해자로 재구성하기에 이른다. ‘타락한‘ 흑인 여성과 ‘순결한’ 백인 여성 간의 인종적 분리는 백인 여성의 신분 상승을 일으켰다.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주인이 된 백인 여성과 반대로, 흑인 남성 노예와 동일한 노동을 수행하는 흑인 여성은 ‘진정한 여성성’을 갖추지 못한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노예해방론자인 백인 여성들마저 흑인 여성을 강간의 ‘공모자’로 보았고, 이들의 연민은 흑인 여성에 의해 죄를 짓게 된 백인 남성을 향했다. 벨 훅스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스탠리 펠드스타인Stanley Feldstein의 글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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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흑인들의 기록에서 자료를 모아 노예제의 실상에 대해 기록한 스탠리 펠드스타인의 『한때는 노예였다Once a slave: the slave's view of slavery』에서 저자는 백인 여주인이 외출에서 돌아와 옷방 문을 열었을 때 남편이 열세 살 노예 소녀를 겁탈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던 사건을 서술한다. 여주인은 그 장면을 보자마자 노예 소녀를 때리고 훈연실에 가두어버린다. 소녀는 몇 주 동안 매일 매질을 당했다. 나이 많은 노예들이 나서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고 호소하며 백인 남주인의 잘못이라고 말하자 여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앞으로 잘 처신하라고 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혼쭐을 냈으니 앞으로 무지하다는 이유로 이런 일을 저지르진 않겠지.” 백인 여성은 성폭행의 책임이 흑인 여성 노예에게 있다고 믿었는데 19세기 성 윤리관에서 남자를 유혹하는 주체는 여자였고, 백인 여성도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_본문, 7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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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인 남성은 흑인 여성 노예가 어떻게 남성과 동일한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렇게 흑인 ‘가모장제’의 신화가 탄생했다. 흑인의 경우 남성 가부장의 수입만으로는 가정을 부양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로 인해 흑인 여성의 노동은 불가피했으나, 백인 남성은 이것이 흑인 여성이 ‘남성화’되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더불어 흑인 여성을 ‘강간당하길 원하는’ 여성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인종 간 성적 결합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흑인 가모장제의 신화는 “노예제의 가장 큰 피해자가 전통적인 남성 역할을 빼앗긴 흑인 남성”이라는 식의 이론으로 발전했다. 이는 흑인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기 흑인해방운동의 성차별적 한계로 드러난다. 흑인 남성 지도자들은 흑인 여성이 운동에 참여하기보다 내조하는 아내의 역할에 그치기를 기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초’적인 가부장을 숭배하는 문화가 등장하며, 흑인 남성은 흑인 여성을 지배함으로써 ‘진짜 남성’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처럼 존중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흑인 무슬림 운동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온몸을 가린 흑인 여성은 드디어 흑인 사회 내에서 ‘흑인 여성’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흑인 남성은 무슬림이 아닌 흑인 여성을 여전히 강박적으로 비하하고 폄하했다. 제국주의적 가부장제에 따라 흑인 여성은 잔인하게 억압당했고, 흑인 여성과 흑인 남성 사이에는 억압자/피억압자 간의 구조적 증오가 자라났다. 벨 훅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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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무슬림 운동의 중요한 특징은 많은 구성원들이 흑인들의 정화와 순결을 금욕주의적일 정도로 강조했다는 점으로, 특히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구속하고 단죄했다. 미국 가부장제에서 모든 여성은 성적인 죄를 상징했다. 성차별과 인종차별로 인해 흑인 여성은 여성을 비하하고 모멸할 필요가 있는 이 사회에서 가장 만만한 타깃이 되었다. 백인 여성은 상징적으로나마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존중했지만 흑인 여성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여자, 망가진 여자였다. 흑인 지역사회에서 백인 여성에 가장 가까운 밝은 피부의 흑인 여성은 “레이디”로 여겨졌고 피부색이 짙은 여성은 못된 년이나 창녀로 여겨졌다.
_본문, 18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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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에 따르면, 미국의 모든 여성은 교육 수준, 경제 수준, 인종적 정체성에 상관없이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 계급주의자로 사회화되었고, 이는 미국 여성인권운동의 한계로 작용했다. 미국의 역사가 성차별적 제국주의에서 인종차별주의적 제국주의로 전환되었을 때, 백인 여성인권운동가들은 여성을 ‘백인 여성’, ‘흑인’을 흑인 남성으로 정의하며 ‘여성’과 ‘흑인’의 고난이 비슷하다고 외쳤다. 이는 인종 간 분리를 넘어선 연민이 아닌, 백인의 인권이 흑인의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인종적 연대에 기반한 호소였다. 특히 백인의 여성인권운동은 인종주의뿐만 아니라 계급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어, 이중 삼중의 착취에 시달리는 흑인 여성에 대한 배제는 심화되었다.
여성인권운동에 백인 가부장제의 인종-성별 위계가 적극적으로 수용되었기에, 여성인권운동사에서 흑인 여성들의 발자취 역시 자연스레 지워졌다. 백인 역사학자들은 흑인 여성인권운동은 여성인권운동 그 자체보다 인종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19세기의 흑인 여성은 성차별의 가장 큰 피해자로, 성차별에 대한 인식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반적 개혁만을 추구할 수 있는 백인 여성과 달리 흑인 여성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 해소와 매춘 퇴치운동을 병행해야 했던 흑인 여성의 상황으로 인해, 이 인식은 조직적인 운동의 형태로 발전할 수 없었다. 한편, 이러한 인종적 구분에도 불구하고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추구했던 개혁의 방향은 비슷했다. 여성의 결혼에 대한 선택권, 문명의 균형적 발전을 위한 여성의 교육과 참정권이 이들의 요구였다.
그러나 20세기에 실현된 여성 참정권은 여성 공동체의 정치적 힘이 아닌, 흑인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투표권에 대한 실망과 짐 크로 법으로 대표되는 인종 분리 시스템의 강화로, 흑인 여성 활동가들은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투여해야 했다.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은 흑인해방 투쟁을 기본적 권리 회복으로 강조하고 싶었기에, 여성해방 투쟁과 같은 급진적 흐름과 선을 그었다. 흑인 여성은 자신을 독립적이지 못한 존재로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또한 페미니즘 담론이 성차별 해소가 아닌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체제 내 성공적 안착을 지향했기에, 페미니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흑인 여성조차 페미니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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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특혜를 받아온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상이 벨 훅스에 의한 흑인 여성의 미국사다. 그녀는 미국 역사 속에서 흑인 여성이 겪어온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억압 구조를 밝히며, 이러한 억압을 끊기 위한 사회적 개혁의 청사진은 성차별주의로부터 해방될 권리가 있는 자매들에 의해 제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내면화된 인종적 분리를 넘어선다면 여성에게 제국주의적 사회질서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연대의 힘이 있음을 설파한다. 즉, 성차별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여성을 분열시키는 인종주의를 넘어서야 하며, 이는 여성의 책임이며 의무다.
흑인 여성에 대해 왜곡된 연출을 바로잡을 책임이 흑인 여성 자신에게 있다면 남성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차별주의의 피해자가 이행해야 할 책임이 명시되는 반면, 가부장제의 특혜를 받아온 이들의 책임은 명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책을 읽은 나는 누구를 때릴 만큼의 확신이 서지 않았다. 벨 훅스의 시선은 따듯하며, 그녀가 추구하는 개혁의 방향성은 일리 있다. 차별을 철폐하는 개혁의 청사진은 차별의 피해자들에 의해 그려져야 한다. 하지만, 이 청사진은 누구에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페미니즘의 개혁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인종주의적 식민주의 철폐다. 인종-성별의 위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남성이 면책된 연대는 이 청사진을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 남성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넘치는 찬사를 받을 수 있다. 그에 반해 여성은 사회적으로 교육된 ‘여성성’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페미니즘을 충분히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자책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여성해방의 책임을 여성의 어깨에만 온전히 두는 한, 페미니즘을 위한 여성의 희생은 당연하고 남성은 면책된다. 이는 정당하지 않을뿐더러 사회 개혁을 이룰 방법도 아니다. 가부장제를 철폐하고 압제자/피압제자 모두가 자유를 얻기 위해선 모두가 개혁에 참여해야 한다. 이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선택이 아닌 의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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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가은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1기. 뭐든 한번쯤 해보고 싶어하는 성향의 부작용으로 학사과정 중에 영문과, 영화과, 철학과, 경영학과 등의 전공을 거쳤다. 그로 인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는 없었으나, 독서는 폭넓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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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제국주의 #성차별 #인종차별 #가부장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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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책과참치 구독자께 알립니다. 오늘 문학동네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신간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가 출간됩니다. 기다려온 독자들이 많은 책인 만큼, 문학동네와 함께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아래 소개를 읽고 '기대평'을 남겨주시면 다섯분을 선정해 책을 선물해드립니다. 뉴스레터 책과참치가 발행되는 8월 21일 목요일 오전 중, 주요 온라인 서점에 책이 등록될 예정이니 출판사의 소개를 참조해 기대평을 작성하셔도 좋습니다. 관심 있는 독자들께선 아래 소개를 확인 후, 서둘러 기대평을 남겨주세요!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젠더 트러블』 이후 35년 만에 ‘젠더’에 천착한 저작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사안의 우선순위를 매기며 소수자의 삶을 뒷전에 두는 권위적인 기존 정치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인 동시에, 반젠더 세력이 실제로 무엇을 파괴하는지, 젠더 연구가 추구하는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론과 사례, 통찰과 함께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은 모두가 자유롭게 살아 숨쉬고 누구나 ‘살 만한 삶’과 사회를 위한 연대로 나아가는 문이 되어줄 것”이라고 한다. 젠더를 추방하고 척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계엄의 시공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사회와 시스템에 뿌리박힌 이 음험한 폭력성의 토양이 자랄 수 없도록 지속적인 싸움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버틀러가 말하는 ‘모두가 살 만한 삶’은 그저 주어지는 것일 수 없겠다.
반젠더 이데올로기 운동에 반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 운동이 표적으로 삼은 모든 이들을 결집하고 동원하는 초국가적 연합이다. 평등과 정의에 헌신하고, 삶에 필수 불가결한 자유와 힘을 수호하고 긍정하는 데 헌신하는 광범위한 운동 내부의 싸움은,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대결과 대화로 이루어져야 한다.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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