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편집자의 2025 서울국제도서전 ‘리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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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돌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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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잊는다. 책이 사고파는 상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독서, 공연, 전시 등을 향유한다, 즐긴다는 말보다 ‘소비한다’고 표현하는 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시절에 이런 건망증은 책 만들어 먹고 사는 편집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되려 치명적이다. 책이 상품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정도라면, 나는 아무래도 융통성 없고 무능한 편집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망각의 본질적인 원인은 책이라는 상품이 지닌 모순, 즉 책이 품는 정신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가 책의 상품으로서의 속성을 자주 배반하기 때문이라고 우겨본다(노벨 문학상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에 수여되는 게 아니니까). 혁명가가 아닌 이상에야, 편집자는 ‘상품’과 ‘작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잘해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내게 서울국제도서전과 같은 책 축제는 모든 출판인이 총출동하여 이런 고민과 갈등, 타협, 좌절 속에서 텍스트와 시민을 연결하려는 절박하고 찬란한 서커스처럼만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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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서울국제도서전 ‘비주얼 아이덴티티’는 워크룸프레스 출판사가 디자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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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목표는 무사히 달성하셨는지요?
서울국제도서전은 두말할 것 없이 출판사 마케팅 부서의 가장 큰 연중행사가 되었다. 큰 출판사는 큰 출판사대로 작은 출판사는 작은 출판사대로, 각기 달성해야 할 도서전 매출 목표가 있고 알다시피 매출 목표라는 것은 호/불황에 상관없이 늘 ‘작년보다 높게’ 책정되므로 마케터들은 이를 악물고 작년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리기 위해 진땀을 뺀다. 그러므로 그들의 빛나는 아이디어와 땀과 눈물 덕에, 도서전에 참가하는 모두가 ‘작년보다 더’ 행복한 도서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마케터님들, 너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올해도 읽을거리, 볼거리 풍성한 도서전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주말 특근 수당도 톡톡히 받으시고 특별 휴가라도 얻어 쉬셨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작년보다 높은 매출 달성’이라는 매출 목표가 존재하는 한, 마케터들은 '행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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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즈 없는 도서전은 이제 상상할 수 없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부터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녔다. 도서전 기간 한정으로 파격 할인되는 구간 도서들을 대량 구매할 수 있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도서전만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나는 커다란 빈 가방을 들고 가서, 평소라면 살 수 없는 서양의 오래된 미술 출판사들의 큰 판형 양장본들을 싼값에 여러 권 사서 돌아오곤 했다. 학부모들은 어린이 그림책을 그런 식으로 많이 샀다. 멀쩡한 책을 정가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므로 서울국제도서전은 축제라기보다는 도떼기시장 같았는데, 아주 가끔 그때의 소박한 분위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창고에 쌓여 있던 재고를 순식간에 어느 정도 소진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기회이니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값이 싼 구간을 사는 데 독자들이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지금처럼 굿즈를 많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로부터 약 십 년이 지난 2025년의 도서전에서는 출판사마다 개성 넘치고 아기자기한 굿즈들을 야심 차게 선보였다. 책보다 굿즈가 더 많이 보이는 도서전이라는 비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 사인회를 제외하면 도서전을 위한 특별 굿즈가 거의 유일한 소비자 유인책이기에 굿즈들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종류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신간 홍보를 위한 굿즈는 이런저런 제약이 많아서 만들 수 있는 제품도 한정적(에코백, 머그컵, 다이어리…)이고, 독자들도 웬만해서는 굳이 마일리지를 차감하면서 굿즈를 사지 않기 때문에 평소라면 크게 매력을 못 느끼지만, 그런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도서전 굿즈들은 재밌고 귀엽고 아름다운 것들로 넘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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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전 셋째 날, ‘인공지능의 미래’를 주제로 궤도와 이세돌 구단의 대담이 열렸다. 알파고와의 대국에 대해 이세돌 구단을 통해 직접 듣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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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출판사는 그런 와중에 도서전을 위한 굿즈를 만들지 않기로 해서 이목을 끌었다. 고민이 없지 않았겠지만,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기후위기와 패스트패션에 맞서는 제로웨이스트 의생활』 등 지구환경과 생명, 기후에 관한 책을 내는 출판사다운 결정이 멋있었고, 일석이조의 스마트한 브랜딩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굿즈 경쟁에도 어김없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작용할 텐데, 그 이전에 지구를 위한 작은 실천으로서 도서전에 참여하는 출판사들끼리 굿즈 제작에 관한 협약 같은 걸 만들어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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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이후의 첫번째 도서전
윤석열 탄핵을 이끌어낸 당당한 승리자들이 도서전을 가득 메웠다. 지난겨울 추운 광장을 지켰던 2030 여성들이 도서전을 한껏 즐긴 것이다.1) ‘그래서’라고 생각한다.
오월의봄 출판사는 당당하게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는 깃발을 내걸었고 대만(주빈국)의 독립 비엘 출판사 Rusuban Studio 부스도 한국 독자들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손 꼭 잡고 구경 다니는 레즈비언 커플도 여럿 있었다.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도, 퀴어 출판사 움직씨도 독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리고 이런 풍경은 유별나지 않고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다. 내란 세력을 제압한 여성들이 ‘쟁취해낸’ 지금-여기의 텍스트힙은 그런 것이었다. 이들은 도서전을, 축제를, 마음대로 마음껏 즐겨야 마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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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말 아쉽게도 모두를 위한 도서전은 분명 아니었다. 시작 전부터 사회적 약자 배제 논란을 일으킨 얼리버드 티켓 판매 문제가 상징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책-문화 행사임에도 행사장 내에 장애인 이동권이나 어린이와 노약자를 위한 배려를 쉽사리 찾기 어려웠다. ‘배리어 프리’는 대규모 행사라면 이제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는 사항 아니었나? 물론 올해만 유독 그런 배려가 없었던가 하면 그건 아니지만, 반헌법적 내란 세력의 계엄을 뚫고 난 뒤에 열리는 도서전은 상업적인 것 이상으로 그들보다 정치적으로 더 나은 태도를 보여주는 데 신경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거기 모인 모두가 좁은 이동 통로와 북적대는 인파… 만으로 마음 한쪽이 불안하고 불길했던 것도 맞다. 안전하다는 느낌을 좀처럼 받기가 어려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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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전 뒤편의 출판노동자들에게
‘서울국제도서전 사유화 반대 연대’가 목소리를 내주지 않았다면, 공공재로 누리던 도서전이 사유화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점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출판에 대한 무지와 탄압이 ‘출판 인클로저’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건 상식에 속할 텐데,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에 대해서 좀더 많은 정보가 속 시원하게 드러나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떠들썩한 축제의 뒤편에서 외롭게 ‘사유화 반대’의 목소리를 내준 출판인 동료들에게 마음 깊이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출판 정신’은 화려한 도서전보다는 오히려 이런 데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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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지성사 부스 한쪽에 내걸린 ‘서울국제도서전 사유화 반대’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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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대 인파가 모인 도서전이었다고는 하지만, 유튜브 채널이나 SNS를 통해 평소 독자들과 거리를 좁혀온 출판사들이나 대형 출판사들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올해는 특히 배우 박정민의 행보에 대한 독자-관객의 관심이 뜨거웠다. 책과 출판을 애정하는 그의 진심이 통해서였겠지만, 한국 출판계가 주목 경제의 논리에 크게 좌우되다보니 그 시너지도 컸을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균형은 필요하다. 출판계는 연예계가 아니고, 책은 언제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지기에 묵묵하게 일하는 수많은 출판인이 건강한 독서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행여 있을 오탈자나 오역에 전전긍긍하는 ‘편집’자들이 당신이 읽을 텍스트를 아름답게 가꿔가고 있음을 잠시나마 기억해주면 좋겠다.
도서전 준비하느라 고생하신 동료, 선후배님들 덕에 올해도 책 덕후는 즐거웠습니다. 이제 상반기 매출을 결산하고 하반기를 향하여 또다시 달리기 위해 숨을 고르고 계실 텐데 부디 힘 나는 일, 재미나는 일 많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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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돌문어
어쩌다보니 꽤 오랜 시간 논픽션 편집자로 일해왔습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지인 경북 영주, 안동 등지에서 돌문어는 제사상에 올리는 귀한 식자재인데, 반가운 손님을 맞이할 때도 숙회로 내놓는다고 합니다. 부드럽고 쫄깃하게 삶은 돌문어 같은 책들을 이곳에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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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도서전 #서국도 #서울국제도서전사유화반대 #굿즈 #독서 #독서문화 #책 #도서전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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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각’ 퀴어 만화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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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서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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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퀴어였군!
1990년대부터 동인지로 소비되던 한국 BL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뒤로 오늘날 우리나라 웹툰 플랫폼의 주력 산업이 되었다. 특히 레진코믹스에서 연재된 『야화첩』은 BL 판에서는 ‘국위선양’으로 칭송될 만큼 글로벌 BL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레진코믹스를 비롯해 봄툰, 리디북스는 BL을 공격적으로 마케팅했고, 그 전략은 폭발적인 매출 증가로 돌아왔다. BL을 탐독하는 (여성) 독자들이 스스로를 ‘썩을 부’ 자를 써서 ‘후조시腐女子’라며 자조했던 과거가 무색할 만큼 BL은 어느새 공론장에까지 등장할 정도가 되었고, 이제 웹툰 플랫폼에서 ‘BL’ 카테고리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따라 BL 팬들이 자신의 취향대로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폭도 넓어졌다.
그런데 BL 산업의 흥행이 가져온 흥미로운 지점도 목격된다.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바로 한국 웹툰 플랫폼에는 ‘LGBTQ+’ 혹은 ‘퀴어’ 카테고리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 웹툰 산업의 9할을 이끄는 플랫폼인 네이버, 카카오페이지, 리디북스, 봄툰, 레진코믹스, 탑툰 등에서 ‘LGBTQ+’ 카테고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태국이 ‘LGBTQ+’ 카테고리를 서비스하고 있는 풍경과 대조적이다. 일례로 미국의 웹툰 플랫폼 타파스Tapas는 BL, GL, LGBTQ+를 모두 장르명으로 서비스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BL과 GL은 구분하고 있어도 LGBTQ+는 없다. 그러다보니 LGBTQ+에서 ‘L’(레즈비언)은 GL로, 나머지는 적당히 BL이나 일상물, 드라마 장르로 서비스된다.
LGBTQ+ 대표작으로 영국 아마존에서 그래픽 노블 1위를 차지한 앨리스 오스먼의 『하트스토퍼』 역시 한국에서는 BL 카테고리로 서비스되거나, 그래픽 노블로만 분류된다. 이 작품은 청소년의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의 혼란과 갈등이라는 주제를 진지하되 너무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웹툰 플랫폼에서는 이 작품을 ‘LGBTQ+’의 대표작으로 소개하면서도, 작품명 옆에 ‘BL’임을 명시하고 BL 카테고리에서 서비스한다. 그 때문인지, 인터넷 유저들 사이에선 이 작품이 BL로 이해되는 경우들도 종종 목격된다. 비단 이 작품만은 아니다.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 역시 BL로 명시되어 있다. 이 작품은 변호사와 미용사인 게이 커플이 요리를 통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그런 연유로 BL 팬들 사이에선 요리 만화나 일상물이지 BL이 아니라는 항변(!)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어제 뭐 먹었어?』는 언뜻 보기엔 요리 만화처럼 보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게이 커플이 일상에서 느끼는 차별과 억압, 그로 인해 반복된 상처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극복한 이들의 일상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LGBTQ+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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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만화 현황
오늘날 한국 웹툰 산업에서 LGBTQ+의 설 자리가 없는 것은 이들 작품의 창작과 소비가 많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게다. 물론 흔히 ‘퀴어툰’ ‘퀴어물’이라 일컫는 LGBTQ+ 작품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웹툰 『모두에게 완자가』나 『어세오세요 305호에!』 모두 네이버에 연재되면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한때나마 퀴어 전문 웹툰 플랫폼인 ‘까만 봉지’가 서비스되기도 했다. 그러나 웹툰 작품의 총수에 비해 그 비중은 역시 미미하다. 게다가 몇 작품을 제외하면 흥행 실적은 저조하다. 결국 한국의 LGBTQ+는 BL, GL,드라마 같은 카테고리로 서비스하는 방식을 채택하거나 포스타입, 딜리헙과 같은 오픈 플랫폼을 대안으로 삼아 연재해왔다. 아무래도 상업 논리가 앞서는 플랫폼 산업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다보니 LGBTQ+를 다루는 만화는 주로 종이책으로 출간되고 있다. 그나마 최근 출간되는 LGBTQ+ 작품들이 눈에 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 장르의 고전으로 읽혀온 앨리슨 벡델의 『펀 홈: 가족 희비극』(움직씨, 2018)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이 보이지 않더니 2020년부터 출간작들이 늘어나고 있다. 틸리 월든의 『스피닝』(창비, 2020), 카트린 카스트로·캉탕 쥐시옹의 『나단이라고 불러줘』, 오쿠라의 『우리 아들은 아마도 게이』, 마이크 큐라토의 『플레이머』, 파랑윤의 『레생보: 레즈비언 생활보고서』(움직씨, 2023), 마이아 코베이브의 『젠더퀴어』(학이시습, 2023) 등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출간작들은 이전에 비해 LGBTQ+가 안고 있는 보다 다양한 주제들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한층 공감과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이 가운데 LGBTQ+ 장르를 넘어 만화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각종 만화상을 수상하며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언급된 두 명의 작품이 있다. 정해나 작가의 『요나단의 목소리』(놀, 2022)와 틸리 월든의 『햇살을 타고』(이숲, 2020)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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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사랑에도 예외가 있나요? : 정해나, 『요나단의 목소리』
어쩌면 한국 작가의 작품이 거의 없다는 점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외국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그중 한국 LGBTQ+ 만화사에 획을 그었다고 평가할 만한 작품이 출간된 것은 희망적이다. 바로 정해나 작가의 『요나단의 목소리』다. 이 작품은 2018년 7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오픈 플랫폼 딜리헙에서 비정기적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그후 텀블벅을 통해 2022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2023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부천국제만화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퀴어 장르가 이렇게 주목을 받은 것은 한국 만화사상 처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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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의 목소리』는 주로 선우와 의영의 시점을 교차하며 동성애자인 선우에게 가해진 종교의 억압과 주체의 충돌, 그리고 이를 통해 한 주체가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는 성장 과정을 풀어간다. 『요나단의 목소리』의 주인공 선우는 착한 아들이고 모범생이며, 성가대원이자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청소년이었다. 그에게 찬양은 하나님과의 소통이었고, 교리는 의심 없는 세계였다. 그러다 문득 친구 다윗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알았을 때, 그는 죄인이자 부모에게는 수치스러운 아들이 되었다. 기독교에서 동성애자들, 혹은 ‘LGBTQ+’의 인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퀴어신학도 존재하기에 기독교 전체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국내 기독교가 해석하는 성경에서 성소수자가 설 자리는 극히 좁다. 그렇다면 종교를 버리면 쉬운 일이건만 기독교인에게, 그것도 모태신앙인 성소수자에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선우는 목사님의 아들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을 버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 않는가.
작가는 성경에서 자신보다 다윗을 더 사랑했던 요나단의 이야기에서 작품의 모티프를 따왔다고 한다.1)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며 다윗의 친구다. 아버지인 사울은 왕위를 위협하는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을 사랑했던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대항하면서까지 그를 보호해준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아버지와 친구 사이에서 갈등하던 요나단의 시간은 고통에 가깝지 않았을까. 선우는 그런 요나단의 절규와 같은 목소리를 형상화했다. 그 과정에서 선우는 ‘신의 사랑에도 예외가 있다면, 종교는 왜 필요한가요’라는 질문을 묻고, 또 묻는다. 물론 이 질문이 신에게 답을 구하기 위함은 아니다. 반복되는 질문은 하나님도, 사랑하는 다윗(성지향성)도 포기할 수 없는 선우 스스로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요나단이 처한 어려움을 섬세하지만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억지스런 장면 전환이나 극적 반전을 노리는 연출도 없다. 화려한 색채나 유려한 그림체를 선보인 것도, 그렇다고 특별한 연출을 한 것도 아니지만, 캐릭터의 감정을 따라가게 하는 흡입력을 보여준다. 근원적인 질문들을 이끌어내는 인물들과 적절한 템포에서 여운을 주는 여백들은 독자로 하여금 작품이 던진 메시지에 공명하게 한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질적인 것들의 배치다. 『요나단의 목소리』는 기독교와 동성애, 교회와 가출 청소년의 집, 찬송가와 대중음악(자우림)과 같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들을 발견하고, 이를 선우라는 인물의 세계에 배치한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세계가 선우의 몸을 관통하면서 마침내 양립 가능한 것으로 귀결되고, 피하고 억누르기만 했던 선우는 더는 “고개를 돌리지 않기로”(3권, 292쪽) 한다. 이로써 선우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다. 『요나단의 목소리』는 성소수자에게도 신의 사랑이 닿기를 바라는 기도문으로 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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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적 수행성을 상상한 SF : 틸리 월든, 『햇살을 타고』
틸리 월든의 『햇살을 타고』의 한국어판 표지에는 ‘유토피아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한 SF 그래픽 노블’이라는 카피가 쓰여 있다. 틸리 월든은 2017년 『스피닝』으로 최연소 아이스너상Eisner Award을 수상하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 중 추천작을 고르라면 단연코 『햇살을 타고』다. 『햇살을 타고』는 만화가 표현할 수 있는 상상력과 연출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그래픽 노블이다. 작품은 반중력 스테이션, 퀴디치, 물고기 모양의 비행선 등 SF의 요소와 숲의 정령이 살아 있는 신화적 상상력이 어우러진 ‘틸리 월든의 우주’로 이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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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 월든이 재구성한 유토피아는 이분법적 성별을 해체하고 성별 정체성을 유동하는 논바이너리의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의 지구적 시각에서 작품을 보자면 여성만 존재하지만, 틸리 월든의 우주에서는 성별이 없다. 게다가 틸리 월든은 인종, 계급, 가족 문제까지 유연하자고 주문한다. 우주를 유영하듯 말이다.
『햇살을 타고』는 고대 건축물 복원을 위해 우주 비행팀에 합류한 미아의 고교생활과 현재를 다룬다. 미아가 기숙학교에서 만난 첫사랑 그레이스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과거와 졸업 후 고대 건축물 복원팀에 합류해 모험을 하며 성장하는 두 개의 플롯이 교차되며 전체를 구성한다. 미아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모든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액티스 우주선 팀을 이끄는 책임감 강한 샬럿, 내성적인 샬럿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팀을 이끄는 알마, 사고로 인해 말을 잃게 된 천재 기술자 엘리엇, 말썽쟁이이지만 의리가 있는 줄스. 그들이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은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익숙한 세계로 독자를 이끌기 때문일 게다.
우주선 액티스의 팀원들은 우주를 모험하며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유목민적 삶을 산다. 구속 없는 자유로운 삶이지만 최소한의 원칙과 방향은 있다. 예를 들어 ‘그녀she’나 ‘아가씨’가 아닌 ‘they’로 호명할 것, 특별한 성역할이나 지위고하는 없을 것, 세계에는 ‘엄마’들만 존재하기에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며 그저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면 될 뿐이다. 작품은 그레이스가 자신의 고향 행성인 스테어케이스를 떠나 ‘액티스’ 팀과 합류했을 때조차도 가족을 혈연이 아닌 선택의 문제로 치환한다.
이처럼 『햇살을 타고』의 인물들은 성별, 인종, 계급, 가족, 비인간에 이르기까지 고정된 명사가 아닌 동사로 끊임없이 유동하는 신체들을 표현하고 행동함으로써 퀴어적 수행성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론 인물들이 분투할 필요 없는 세계관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이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새로운 대안 세계를 상상케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 자체로 수행성의 정치를 실현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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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부유하듯 상상하기
틸리 월든의 『햇살을 타고』는 독자를 표현력에 압도당하는 경험으로 이끈다. 이 작품의 사변적 사고 실험은 유연한 칸 연출에서도 파격적이다. 이는 마치 인물들과 함께 우주를 유영하듯 미끄러져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부드러움을 자아내는 곡선의 활용과 비정형적 표현들, 칸과 칸 사이의 느슨함과 유연한 넘나듦, 다양한 칸 배치와 크기 등이 책이 지닌 견고함이라는 물질성 자체를 부드럽게 만든다. 이쯤 되면 틸리 월든의 머릿속이 궁금해질 지경이다. 화려한 색채와 흑백의 조화를 어우르는 작가의 탁월함은 가히 천재적이다. 파랑, 노랑, 빨강, 보라 등 다채로운 색상을 변조하며 정서적 변화를 포착하는 연출은 작품 자체를 따뜻하고 신비한 세계로 이끈다. 이런 매력들 때문인지 『햇살을 타고』는 533페이지나 되는 꽤 두꺼운 그래픽 노블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함 없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경험을 제공한다. 마치 액티스 팀이 물고기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부유하듯 말이다. 우리에게 틸리 월든이 가진 유연한 상상력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있다면 광장의 혐오가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그랬다면 선우도 더 기쁘게 찬양할 수 있을 텐데.
*<햇살을 타고> 원작은 다음 링크에도 공개되어 있다.
https://www.onasunbeam.com/#/chapter-one/
*더 많은 LGBTQ+ 추천 만화를 보고 싶다면 만화연구실 ‘홈통’의 다음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s://blog.naver.com/hometong2020/223432202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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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서은영
기장 바다에서 서핑하고 책 읽는 해녀의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원미동에서 지식 노동자로 지내며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다 물리치료 받으며 산다. 주로 만화, 웹툰 관련 논문과 평론을 쓰고, 서브컬처에 관심이 많다. 글 잘 쓰는 사람을 동경하고 ‘책과 참치’ 같은 낭만적 삶에 가슴 설레며, 오늘도 읽고 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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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BTQ+ #기독교 #정해나 #TillieWalden #그래픽노블 #퀴어 #소장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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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뉴스레터 책과참치는 2주 후 목요일 아침에 또 찾아 뵙겠습니다.
'서평 뉴스레터 책과참치'를 만드는 사람들
기획/편집
김만석, 김성우, 김지원, 박영신,
서민우, 이용희, 이우창, 천정환
디자인 김다혜
발행 콘텐츠랩 책과참치
콘텐츠랩 책과참치
booksnchamch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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