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아우른 시대와
일상생활 그리고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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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고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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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좀 잡수셔요” 하고 그 종이갑의 뚜껑을 연다. 영채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구멍이 숭숭한 떡 두 조각 사이에 엷은 날고기가 끼인 것이다. 영채는 무엇이냐고 묻기도 어려워서 가만히 앉았다. (…) 영채는 집었던 것을 다 먹고 가만히 앉았다. “자, 어서 잡수셔요” 하고 부인이 집어줄 때에야 또 하나를 받아먹었다. 별로 맛은 없으나 그 새에 낀 짭짤한 고기 맛이 관계치 않고 전체가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이 있다 하였다.
_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 2023, 14~19면(이광수, 『무정』 재인용. 표기는 박현수가 수정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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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수의 책 『식민지의 식탁』을 열자마자 울컥했었다. 보신 대로 『무정』(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을 인용한 대목이 튀어나왔으니까. 위의 이야기에 설명을 보태면 이렇다. 기생 영채는 무정한 세상과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버림받은 끝에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다. 그 목숨, 이왕이면 고향의 푸른 물 대동강에 내던지고 싶었다. 그렇게 올라탄 열차 속, 영채의 옆자리에 마침 일본 유학생 병욱이 앉았다. 방학을 맞아 평양 집으로 가던 인정 많은 여학생 병욱은 영채에게 열차 도시락을 권한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음식을 맛보다 병욱에게 마음이 열린 영채는 마침내 병욱에게 쓰러져 운다. 울며 제 신세를 털어놓는다. 먹고, 울고, 정신을 차린 영채는 살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저 한입이 장면뿐만 아니라 인물의 행동과 성격까지 전환시킨 셈이다. 저 행간에는 전근대와 현대가 교차하던 시대, 제국과 식민지라는 상황, 식민지 교육, 외국어의 힘, 끈질긴 봉건제, 차별, 여성, 관부연락선, 경부선, 경의선, 열차 도시락, 박래품의 충격, 음식의 사회사 등등의 만상이 깃들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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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가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과 같은 입체적인 관능/감각 표현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인물과 소설이 이제 더 이상 독자를 설득할 수 없는 문학사의 시대구분까지 품고 있다. 문학이 문학만 말해서는 문학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다. 음식이 음식만 말해서는 음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박현수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음식 문헌을 발굴하고, 다시 읽고, 써왔다. 고답적인 문학뿐만 아니라 문학 안팎의 온갖 자료를 아울러 음식의 서사, 음식의 콘텍스트를 재구성해왔다. 음식에 딸린 일화의 나열로 이룰 작업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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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도 이런 일이! 가 아니라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한겨레출판, 2025)는 식민지 경성을 배경으로 사치품에서 싸구려에 이르는 디저트 또는 별미 또는 간식의 일상생활에 파고든다. 얼핏 차례만 보면 추억의 음식 및 우스꽝스러운(때로 엽기적인) 풍속 모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진짜로 품은 바는 본격 문화비평적 질문이다. 음식은 이야기의 기관차이다. 음식을 통해 식민지 조선 대도시의 일상과 먹을거리를 둘러싼 구체적인 행동과 사람들의 정동이 정교하게 재구성된다. 나아가 한 세기도 더 전의 욕망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전 책과 견주어 살펴보자. 거칠게 요약해 『식민지의 식탁』은 음식의 제도와 권력이, 『경성 맛집 산책』(한겨레출판, 2023)은 그 장소성이,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는 음식의 감각과 정서가 주제이다. 세 책은 구조→공간→감각의 경로를 이룬다.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는 특히 ‘감각’이라는 비가시적인 영역을 통해 식민지의 일상에 보다 깊숙이 육박한다. 아울러 개인의 몸에 자리한 ‘시대’와 ‘계급’과 ‘소비’와 ‘일상생활의 전시 및 과시’를 탐구한다. 그 저류에는 식민지라는 시공간에서의 ‘먹기’, 전근대와는 다른 현대의 ‘먹기’가 지닌 복합적 의미를 입체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가 깔려 있다. 박현수의 탐구는 음식의 정치경제에서 출발해, 식민지 도시인의 소비 체험을 재현한 뒤, 그 체험이 낳은 감각과 정동의 일상생활을 조명하는 데로 접어든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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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위에 구축한 상상력의 묘
구성과 재구성의 매력
다시 책을 편다. 한마디로 이 책은 ‘달콤함으로 풀어낸 식민지 현대사’이다. 다룬 음식은 커피, 만주(달콤한 소를 넣고 구운 일식 과자), 멜론, 호떡, 라무네(탄산음료의 일종), 초콜릿, 군고구마, 빙수 이상 여덟 음식이다. 소재 자체로, 일화와 정보 자체로 이미 재미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옛날에도 이런 일이!’는 박현수의 진짜 관심사가 아니다. 예컨대 글쓴이는 동아일보 1929년 5월 11일자 메이지 초콜릿 광고를 전략적으로 인용한다. 산속 호수 위, 한 척의 보트에 함께 앉은 연인의 모습을 담은 광고에는 아래와 같은 광고 문구가 적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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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서 초코레트만을 (...) 먹고 잇습니다.
_『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 2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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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식민지 조선의 농촌과 소작쟁의와 계급투쟁을 그린 이기영의 소설 『고향』(1933년 11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의 한 장면을 병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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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로 산보 가자.”
“읍내로?—뭐 사주면 가지.”
“뭘 사주늬?”
“련애사탕!”
“호호호—련애사탕이 뭐냐?”
“쪼코레트도 몰나.”
두 처녀는 풀밧헤 대골대골 굴느며 우서댓다.
_이 책, 235~2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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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초콜릿은 사랑의 표현과 감각의 상징으로 변신한 초콜릿이다. 여기서 시대의 상징과 동시대 사람들의 감각과 정서의 화석을 캐낼 수 있다. 또는 박현수가 독해한 바에 따르면, 호떡은 싸게 배불리는 노동자 계층의 간식으로서 지저분하다(싸구려니까), 두렵다(화교의 악마화) 등의 감각과 정서가 깃들어 있었다. 글쓴이는 호떡을 통해 음식에 투영된 사회적 위계와 문화적 혐오를 읽어낸다. 나아가 대중의 욕망이 결코 ‘싸구려’에서 멈출 수 없음, 자본과 매체가 어떻게든 그 욕망을 부추기고 있음을 읽어낸다. 멜론, 초콜릿 같은 외래 사치품은 제국의 시대에 글깨나 읽은 조선 사람, 돈깨나 쥔 조선 사람이 동경과 혐오를 동시에 느낀 사물이었다. 디저트는 ‘문명’의 상징이면서도 대중에게는 쉬이 허용될 수 없는 사치였다. 그것은 어떤 계급이든 동경하는 영화 속 ‘사랑’ ‘연애’ ‘선남선녀’만큼이나 별세계의 사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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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0년 3월 14일자(자료제공__고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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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수는 자신의 작업을 “누가 더 많이 먹는지를 겨루거나 맛집 찾기에 몰두하는 데서 벗어나 먹는다는 행위의 온전한 의미를 더듬어보려는 작업”으로 여긴다. 곧 ‘먹는 행위’를 시대와 사회, 인간의 정동이 만나는 사건으로 파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100년 전 경성의 이면을 상상하게 하는 지도부터 충실히 작성한다. 그 위에 한 세기 전 대중의 감각과 일상생활을 ‘맛’으로 재현하고 구체화하는 서사의 실험을 펼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또한 돋보인다. 박현수가 활용한 소설, 신문, 잡지, 광고, 사진 등 자료는 감각적 재구성과 사회문화적 해제에 충실히 활용된다. 그저 ‘요런 건 몰랐지?!’로 지나치는 법이 없다.
연인을 위해 초콜릿을 준비하는 사내, 군고구마나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는 가난뱅이, 학력을 움켜쥐기 위해 만주 행상에 나선 고학생, 새 시대를 꿈꾸거나 새 시대에 속아서 커피를 마시는 지식인과 신여성, 또는 새 시대를 다 아는 체하느라 커피를 마시는 인간군상, 일상의 별미로 디저트를 먹어 치우는 유한계급 모두 자기 몸을 통해 새로운 근대성을 실천하고 드러내는 감각의 주체로 재구성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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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척 먹던 조선 사람
좋은 척 먹는 한국 사람
현대성과 식민지성이 기괴하게 충돌하는 음식과 감각의 정치학은 오늘날의 먹방까지 환기한다. 사치스런 디저트 또는 ‘싸구려’ 간식을 먹는 식민지의 보통 사람들이나, 먹방을 연출하고 연기하는 자칭 ‘크리에이터’ 그리고 맛집 사냥 및 먹방 시청에 강박된 한국인 모두, 시대의 감각 속에서 자신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먹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감각을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경험하며,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실천이다.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는 디저트 또는 간식이라는, 일견 사소해 보이는 소재가 일상생활에 잇닿은 사회 구조, 문화적 갈등, 계급 간 긴장을 조망할 때에 이렇게 요긴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준다. 물론 서술의 배경 대부분이 경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은 아쉽다고 할 만하다.
대도시 밖 미각 경험이나, 제국의 판도를 아우른 미각 경험을 포괄하지 못한 한계 등을 거론하기란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식민지 경성 중산층의 미각사’로 오해할 만한 여지도 있다. 한입거리로 가볍게 해치우는 사치품 겸 간식과, 밥 먹을 처지가 못 되어 먹는 끼니를 뒤섞은 범주의 혼란은 서술의 통일성을 흔드는 점도 있다. 초콜릿이며 멜론에 견주어, 호떡이며 군고구마는 사뭇 다른 음식 아니겠는가. 하나 다 하릴없는 소리일 뿐이다. 글쓴이는 호한한 자료를 넓고도 깊게 읽었다. 아쉽다고 했지만 실은 기대이다. 논문과 단행본을 통해 박현수는 식민지 음식의 구조→공간→감각의 경로를 이미 마련했다. 이제 그다음에 올 다른 이야기를 기다릴 차례다. 그러고 보니 『무정』의 샌드위치, 연재 당시 지면의 표기로는 ‘싼드윗치’도 영채와 병욱이 한참 친해진 다음에야, 한참 나중에야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다시 떠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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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너 그때에 먹은 것이 그게 무엇인지 아니?”
“나 몰라. 어떻게 먹는 것인지 몰라서 언니 잡수시는 것을 가만히 보았지요.”
“내 아예 그런 줄 알았다. 그것은 서양 음식인데 샌드위치라는 것이야… 꽤 맛나지?”
“응” 하고 고개를 까딱 하며 ‘샌드위치’ 하고 발음을 분명하게 외운다.
_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 2023, 14~19면(이광수, 『무정』 재인용. 표기는 박현수가 수정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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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서로 다가 아닌 데, 요리책으로 다가 아닌 데, 가정과 및 가사과 교과서로 다가 아닌 데서 이만큼 음식 문헌이 구성되었다. 그다음이 궁금하다. 물질과 감각 다음에 올 다음 작업이 더 궁금하다. 음식 문헌을 공부하는 자에게 이만한 자극이 다시 없다. 각주와 참고문헌마저 읽기 즐거운 단행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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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고영
계원예대 강사.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전근대의 무대극과 일상생활에 특히 관심이 깊다. 조리서 밖 음식 문헌을 두루 읽고 있으며, 읽은 자료를 바탕으로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펴낸 책으로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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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디저트 #먹방 #식민지 #초콜릿 #호떡 #음식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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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뇌와 썩는 뇌
: 문형배 재판관 블로그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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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돌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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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법조 엘리트 중 문형배는 몇 명이나 있을까?
문형배 재판관은 대한민국 평균치의 재산만 가지고 평범하게 살고자 애썼다지만 인사청문회에서 담담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직자는 희귀해서 그의 바람과 달리 그는 전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나처럼 닳고 닳은 범인의 눈에 문형배 재판관은 오히려 유난스러워 보인다. 경남 하동의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자라 서울대 법대 83학번이 되었다는 그의 성장기 역시 지금 시대의 입시 문화에 비추어볼 때 이제는 매우 낯선 서사 같다. 워낙에 가난했기에 독지가 김장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겠지만, 고교 평준화와 학력고사 제도의 존재 또한 극빈한 집 아이가 판사가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한국식 ‘개천 용’ 스토리의 드라마틱한 주인공이 될 자격을 잘 갖추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스펙을 ‘레버리지’ 삼아 흔한 계급 상승의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았다(이런 이야기의 최신 버전이 J.D. 밴슨의 『힐빌리의 노래』일 것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의 판사로 일하며 성실하게 공명정대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러던 그가 그의 동문이자 동료 판사였다는 나경원(서울 법대 82학번), 이상민(서울 법대 83학번) 같은 내란 동조 세력과는 비교가 불가한 최고의 법조인으로 이제 뭇사람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존재가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반대일 수 있을까? 그러나 실은 강력한 엘리트주의와 특권의식이 가랑비에 옷 젖는 식으로 내면화되기 쉬운 법원 같은 곳에서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청렴하고 자기성찰적 공직자이길 소망하기란, 평범한(특히나 윤석열처럼 하찮은) 내면의 소유자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종류의 바람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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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라는 초엘리트 사회
사태가 그렇다면 로스쿨이나 사법연수원에서는 법조인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 요새 말로 메타인지에 대한 교육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일정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자격시험도 못 치르도록 말이다. 문유석 작가(aka 판사)는 『쾌락독서』에서 법조인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은 ‘자기객관화’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하면서 법원 문화를 비판적으로 그린 김두식 교수의 책 『불멸의 신성가족』을 외면하거나 냉소하는 판사들에 대해 언급한다. 자기객관화가 잘 안 된다는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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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교수의 『불멸의 신성가족』 같은 책은 법원과 검찰의 권위주의적인 조직문화를 세세히 해부한다. 민주주의를 수호할 최후의 보루라는 곳들이 서열주의, 상명하복, 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평판에 대한 두려움, 청탁 문화, 아랫사람은 쥐어짜면서도 윗사람에게는 순종적인 이중성으로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다양한 내부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 나는 이 책을 읽고는 선배, 동료, 후배를 막론하고 법관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독을 권하곤 했다. 그런데 읽은 후의 반응에는 미묘한 온도차가 있었다. (…) 불쾌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_문유석, 『쾌락독서』, 문학동네, 2018, 209~210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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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수재 소리 들어가며 일등만 해와서인지 자기객관화가 어려운 이들이 모여서는 여느 조직 못지않은 강약약강 권위주의에 휘말려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어쩐지 좀 서글프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말하는 법관들의 오류(와 그로 인한 오심)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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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너가 미국의 로스쿨 제도하에서 양성되는 법률가들이 ‘기이한 수동성’에 빠지게 된다고 한 지적과 직업법관제와 성문법 시스템하의 법관들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은 상통한다. 법률가들이 때로 법만 따지고 현실을 무시하는 판결을 한다는 지적은 바로 이런 법교육과 직업적인 법관으로서의 폐쇄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_김영란, 『판결과 정의』, 창비, 2019, 169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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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들이 자신들의 성채 안에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모르고 법리만 따지며 인정투쟁만 해서는 판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즉 법조 ‘엘리트’ 사회의 꽉 막힌 숨통을 뚫을 제도적 민주화가 합리적인 판결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된 문형배 재판관의 블로그도 이런 고민이 바탕이 된 작은 실천 아니었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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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힙’ 문형배
문형배 재판관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으면서 그의 블로그 ‘착한 사람들을 위한 법 이야기’(https://favor15.tistory.com/)도 덩달아 큰 화제가 되었다. 거기 담긴 그의 독서력은 기분 좋은 파장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나도 블로그를 구경하다가 깜짝 놀랐다. 독서량도 대단했지만, 그가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분야와 난이도를 가리지 않고 ‘읽어대는’ 잡식성 탐독가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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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하는 책이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이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000권 정도 될 것 같다.
_문형배 재판관 2010년 6월 26일 블로그 포스트 「책을 고르는 기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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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배 재판관은 산 책은 다 읽고, 읽은 책 중 마음에 드는 것만 블로그에 짧은 감상평을 올리는 것을 원칙으로 약 20년간 460여 편의 독후감을 썼다.1) 독후감들을 죽 살펴보니 우선 법과 사회의 모순이나 아이러니를 해명하고자 하는 굵직한 (인)문학은 놓치지 않고 읽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이클 샌델, 마사 누스바움, 한나 아렌트, 조너선 하이트, 빅토르 위고, 도스토옙스키 같은 것만 읽는 게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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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노의 가르침』 『역행자』 『타이탄의 도구들』 같은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도 읽고 『21세기 자본』도 『가짜노동』도 읽는다. 강준만도 유시민도 최재천도 김난도도 읽는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도 황정은도 박상영도 한강도 읽는다. 『거의 모든 IT의 역사』도 읽고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도 읽고 『내면소통』도 읽고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도 읽는다.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만큼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도 읽는다. 유명 작가도 읽고 무명작가도 읽는다. 신간도 읽고 구간도 읽는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읽으려면 서점에 수시로 가서 어떤 책이 새로 출간되었는지 눈여겨보고 베스트셀러 매대도 살펴봐야 할 뿐 아니라, 서점 서가에 꽂힌 주목받지 못하는 책들도 샅샅이 구경해야 한다. 그는 최선을 다해 읽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유분방하고 ‘텍스트힙’한 독서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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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과 계엄령
‘읽기와 학습’ 전문 언어학자 나오미 배런이 쓴 『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전병근 옮김, 어크로스, 2023)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읽기 전략에 대해 분석한 책이다. 독서 매체 다변화가 인간의 읽기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독서 문화나 환경을 어떻게 바꾸는지 다양한 실험과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보여주는데, 효율적인 읽기를 위해서는 독서의 목적에 따라 매체를 선택할 수 있고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반드시 종이책을 고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책의 전반적 내용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독서에 관한 이 책의 두 가지 전제다. 첫번째로 ‘비판적 읽기’ ‘깊이 읽기’가 읽는 행위의 정수이며 단편적인 정보를 검색하는 행위와 다르게 우리 뇌의 성찰적/반성적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다중문해력multiliteracies’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문해력을 읽고 쓰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실천의 산물’로 보아온 관점을 언어학적으로 개념화한 것으로 문해력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원천을 인정함과 동시에 읽기를 사회적 이해와 소통이라는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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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독립적인 인격과 민주주의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의미인데, 쇼츠의 시대인 만큼 서사, 논리를 갖춘 ‘긴 글 읽기’ 훈련이 따로 필요하다고 한다. 나오미 배런을 위시한 문해력 연구자들이 밝혀낸바, 결국 좋은 인문학이나 소설을 읽는 건 궁극의 실용성, 뇌를 위한 ‘장기투자’이자 자신과 사회에 모두 유익한, 즉 선한 실천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2023년 성인 10명 중 6명이 일 년 동안 책 한 권을 읽지 않았다는 통계는 국가적 차원의 뇌 건강 이상 신호였을지도 모르고, 계엄령 포고령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낮은 문해력 수준을 보건대 윤석열 일당은 ‘민주주의’와는 애당초 무관한 인물임도 확실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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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썩음의 반대말
옥스퍼드대가 2024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뇌 썩음brain rot’이란 단어는 꾸준히 읽고 사유하는 ‘읽는 뇌reading brain’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해주었다. 뇌 썩음은 흔히 뇌 건강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근력운동이나 명상만으로 온전히 극복할 수 없다. 뇌 썩음의 반대말은 ‘스트레스 없는 상태’가 아닌, 민주주의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문형배 재판관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판결을 이끌어왔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평소의 깊은 통찰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임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통찰은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얻을 수 없다.
여기서 잠깐. 주의해야 중요한 점이 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모두 훌륭한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학식이 높고 글도 좀 쓴다는 자들 중 힘없는 이들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족속도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하지만, 인간이 문제이지 책은 죄가 없다. 혼동해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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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돌문어
어쩌다보니 꽤 오랜 시간 논픽션 편집자로 일해왔습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지인 경북 영주, 안동 등지에서 돌문어는 제사상에 올리는 귀한 식자재인데, 반가운 손님을 맞이할 때도 숙회로 내놓는다고 합니다. 부드럽고 쫄깃하게 삶은 돌문어 같은 책들을 이곳에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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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배 #윤석열 #읽는뇌 #뇌썩음 #문유석 #김영란 #쾌락독서 #판결과정의 #김두식 #불멸의신성가족 #문해력 #다시어떻게읽을것인가 #착한사람들을위한법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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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뉴스레터 책과참치는 2주 후 목요일 아침에 또 찾아 뵙겠습니다.
'서평 뉴스레터 책과참치'를 만드는 사람들
기획/편집
김만석, 김성우, 김지원, 박영신,
서민우, 이용희, 이우창, 천정환
디자인 김다혜
발행 콘텐츠랩 책과참치
콘텐츠랩 책과참치
booksnchamch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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